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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사료 자급화 과녁 맞추기 <3>역사로 본 조사료의 지위

인류, 사냥한 고기 부패 방지 위해 짐승 잡아 먹이 줘


김동균 상지대 명예교수(한국가축사양표준제정위원회 위원)


“축산, 조사료 급여를 계기로 시작” 학설 설득력


1. 축산의 탄생 배경(지혜론)

사람의 생활에서 다른 동물의 흔적을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당장 매일 만지는 지갑은 남의 살갗이 아닌가? 인류사에 공헌이 가장 큰 짐승을 기르는 ‘초식축산’을 시작한 동기를 인류 진화론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인류의 진화과정과 먹이의 흔적으로 미루어 볼 때, 화석인류들은 축산을 모른 채 사냥으로 먹이를 구했다. 체구가 작은 것들은 구하기 쉬웠겠지만, 자주 사냥해야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인의 직계조상이 몇 차례의 빙하기를 넘긴 유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먹이는, 초기에는 순록을 비롯한 중간 크기의 사슴이나 산양 멧돼지 등이 주류를 이루다가 차츰 들소, 말, 심지어 곰, 맘모스까지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큰 먹이 구하기’도 약점이 있었다. 즉, 모든 죽은 동물의 몸 덩어리는 시간이 여러 날 지나면 부패해 맛도 없고 먹기도 불편하며 먹고 나면 배탈이 난다는 점을 터득했다. 그런 까닭에 죽은 동물체는 빨리 먹어치워야 하며, 운 좋게 생포해 온 것은 두었다가 잡아먹어도 신선하다는 점을 곧 이어 알게 됐을 것이다. 이로부터 짐승을 산 채로 잡아들이는 기술도 발전시켰다. 그런데 생포한 짐승조차 주변에서 먹이를 먹을 때는 살아 있을 수 있지만 먹이(풀 등)가 떨어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굶어 죽는 것을 발견한 후, 그 짐승을 좀 더 오래 보관하려고 먹이를 주던 습관이 축산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이렇게 본다면, “축산은 조사료의 급여를 계기로 시작됐다”는 주장을 할 만 하다.    

전통적인 학설로는, 축산업의 성립은 신석기 시대인 1만2천년 전 친화력이 높은 개가 사람주변에서 먹이를 얻으면서 가장 먼저 가축화됐고, 그 다음에 1만년경 말과 소 그리고 산양이나 면양 등 초식동물이 순화(馴化)됐다는 설이 강력했으며, 고대인들은 종교적 희생물로 이들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자주 등장한다. 또한 가축이 된 것들은 야생동물 중 인류를 가장 잘 따르는 성질을 가졌던 것들로서 축산이 가능해 진 까닭을 심리적 교류 등 정서적 요인(육, 1969 축산학개론)에서 찾고 있으나 필자는 심리적 요인보다는 식량으로서 동물체의 물질적 특성이 인류의 인식에 끼친 현상이 더 크다고 본다.


2. 조사료가 시작한 현대 가축사양학

19세기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물질문명이 앞서 있던 유럽 여러 나라 조차 가축의 사육은 관행적 경험에 의존했다. 예를 들면, “늦가을 이후 큰 소에게는 피 8되, 콩 3되 그리고 말린 풀 7단을 먹이라” 이런 식이었다.  

가축사양학의 발전사를 다룬 종설들은, 가축사육에 과학적 방법이 도입된 시기를 1810년으로 잡고 있다. 즉, 독일 학자인 Thaer가 가축의 사료를 야건초 100파운드와 비교해 나타낸 건초값(乾草價, hay equivalent)을 발표한 시점을 고려한 것이다. 야건초라 함은 지역마다 주류를 이루는 ‘들풀’로서 지역의 기후풍토를 반영하지만 영양소 집적체의 가장 자연스러운 실체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도 특정지역의 야초를 다양한 측면으로 분석해 보고, 자생되어있는 들풀은 더 바랄 것이 없는 천연 사료라는 점을 확인했고, 진정한 지역브랜드를 표방하려면 그 지역의 야건초를 적절히 먹인 가축(특히, 소)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건초가’는 당시 가축에게 주어왔던 다양한 먹이의 값어치를 ‘야건초’라는 잣대로 비교해 표현했으니 공식적으로는 사료평가의 효시가 된 셈이다. 그러므로 짐승을 기르는 재료의 중심으로 조사료를 척도삼아 다른 재료의 가치를 나타내다가 오늘날 사용하는 사양표준을 만들게 됐으니 논리를 비약하면, “조사료는 사양표준의 모태”이다.    

건초값이 발표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야 유럽은 영양소 총량으로 사료가치를 표시하게 됐으며(Grouven,1859), 여기에 소화율의 개념을 도입했다가(Wolff,1865) 급기야 유럽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Wolff-Lehman 사양표준』이 나타났다(1896). 그러므로 가축사육은 19세기가 끝날 무렵에서야 소화율까지 고려한 사양표준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매우 바람직한 연구 성과가 있었다. 즉, 위스컨신대학의 Henry박사가 ‘Feeds and Feeding’ 초판을 발행(1898)하면서 구대륙과 신대륙간 과학적 경쟁이 펼쳐졌다. 이 책은 1910년에 제 10판을 발간할 즈음 제자인 Morrison박사가 조력하면서 논리의 체계와 정확도가 한층 강화되어 미국의 축산기술이 세계를 이끄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명저는 원저자인 헨리가 사망한 이후 Morrison이 제 22판(1956)까지 발전시키면서 이를 바탕삼은  ‘모리슨 사양표준’은 1960년대까지 전 세계 가축사양의 보전(寶典)으로 활용됐다. 

그러다가 1916년에 미국과학아카데미(NAS)가 국가연구회의(NRC)를 창설해 동물영양위원회(CAN)가 만들어지면서 세계 사양표준의 주도권을 미국이 거머쥐게 됐다.  NRC 사양표준은, 미국 전역의 주요 대학들이 막대한 국가 예산지원을 받아 연구한 결과를, 매우 공평하고 실적이 풍부한 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제정한 것으로서 체제나 정확도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사양표준을 제정할 때 이것을 밑바탕 자료로 많이 이용했다. 나라마다 자국의 사양표준을 만드는 이유는 거의 주권적 차원이다. 즉, “내 땅 위에 발 딛고 선 가축이나 먹는 사료는 너희 땅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보아서 무리가 없다.


축산신문, CHUKSA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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