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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동물복지 오디세이 <12> / 刻舟求劍 : 미련하고 어리석음

  • 등록 2021.11.24 09:31:23


전 중 환 농업연구사(농진청 국립축산과학원 동물복지연구팀)


1. 프롤로그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직면할 때 많은 좌절과 실망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에 학업을 게을리 해서 성적이 떨어졌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괜한 고집을 피워 입장이 곤란해졌을 때, 직장에서 맡은 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질책을 받을 때 등 다양한 문제들을 겪게 된다. 이런 문제들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미리 준비하지 못했거나 미숙한 대응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그 원인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익숙함이 오히려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잊기도 하며 하루하루 노화가 진행되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익숙함은 변화에 대한 적응을 더디게 만들기도 하며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하여 일을 그르치게 한다.

동물복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가축관리와 사육방식에 익숙해져 있음으로 인하여 개선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익숙함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경계하고자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2. 익숙함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

벌써 십년이 더 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때는 2006년 여름,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Animal welfare program에서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 나의 Supervisor였던 Weary 교수님이 갑자기 나를 찾으시더니 가축의 발성음을 분석하였던 나의 연구경력을 말씀하시면서 랫트(Rat)의 초음파 발성음 분석을 지시하셨다. 나를 따로 찾아서 연구를 맡기시는 것에 대한 뿌듯함과 더불어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교수님으로부터 샘플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분석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냐는 질문에 호기롭게 2주 정도면 충분하다고 답하였다. 교수님은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2주 만에 분석을 마칠 수 있다고?’라고 되물으셨다. 실제 샘플 수도 많지 않았고 발성음 분석이라면 이골이 났기에 내 나름대로 한 일주일 정도 만에 끝낼 요량이었다.  

Animal welfare program에 설치되어 있는 분석 프로그램은 처음 접해본 프로그램이어서 우선 프로그램 사용법 및 샘플 분석법 등을 익혀야 했는데 빨리 결과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 몸이 달아올랐다. 드디어 며칠의 시간이 흐른 후 발성음 분석을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동물의 발성음을 분석하는 방법은 청각을 이용하여 녹음된 부분의 발성음을 확인하고, 프로그램에 표기되는 스펙트럼이나 스펙트로그램에 기초하여 샘플링한 후, 음성학적 분석을 실시한다.  

자주 수행했던 분석이고 내가 애용(?)하던 헤드셋도 챙겨왔던 터라 더없이 자신감이 넘쳤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녹음된 부분의 발성음이 확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을 했지만 청각으로 샘플을 확인할 수 없었다. 프로그램 화면을 확인하니 스펙트럼은 확인이 된다. 컴퓨터를 재부팅해보기도 하고 헤드셋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했으며 파일에 문제가 있는지도 살펴보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도 안 되는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며칠을 끙끙대며 시간을 허비하였다.

교수님과 약속했던 2주 중의 절반인 일주일이 지난 주말까지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져있었다.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관련 논문들을 뒤적이며 한 숨을 쉬던 중 논문제목의 한 단어에 시선이 머물렀다. ‘Ultrasound’…, 그렇다. 바로 내가 분석해야 하는 랫트의 초음파 발성음(20~50 kHz)이었고 사람의 가청범위를 벗어난 초음파 발성음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理致)였다. 나는 분석해야 하는 발성음의 특성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고 늘 하던 것처럼 헤드셋을 쓰고 청각에 의존하여 샘플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익숙함이 만들어낸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일주일간 이어졌던 끝없는 고민과 절망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이 사건은 지금도 무언가에 익숙해질 때면 항상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3. 에필로그

익숙함이 무조건적인 부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나 재주가 익숙해지고 숙달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맹목적이거나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익숙함으로 인해서 발생될 수 있는 어리석은 행동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뜻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 젊은이가 소중히 여기는 칼을 가지고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실수로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놀란 이 사람은 얼른 주머니칼을 꺼내어 칼을 떨어뜨린 부분의 뱃전에 표시를 해놓고 배가 언덕에 닿자 표시해둔 뱃전 근처에서 떨어뜨린 칼을 찾았다고 한다.

축산분야의 동물복지에 대해 지나치게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동물복지로의 변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너무 기존의 사육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라 판단된다. 


축산신문, CHUKSA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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