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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인구, 식량 그리고 당대의 인연

  • 등록 2019.07.17 10:21:02


김동균 이사장(前 상지대교수, 강원도농산어촌미래연구소)


얼마 전 지구 인구수가 77억 명을 넘었다. 지난 세기에 우리나라는 늘어나는 인구를 조절하려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가 대세를 이루었는데 지금은 세계 제일의 저출산 국가가 되어 인구 절벽으로 인한 문제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이 1세기 걸려 형성된 노령화 현상이 단 17년 사이에 일어났고, 현재의 추세라면 300년 후 한민족이 멸종된다는 학설도 퍼지고 있다. 이것도 그 때 가 봐야 알 일이지만 인구문제는 심각한 국면에 와 있다.  
한 사람이 평생 먹는 음식의 총량은 평균 100톤으로 추산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 상황에서 인류는 7천700억톤의 생태계 원소를 입속으로 넣고 지낸다. 인구 수천만 정도인 국가라도 식량이 100만톤 부족하면 수백만명을 굶겨 죽일 만큼 심각한 국가비상사태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볼 때, 호구지책에 관한 문제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문제이다.
식량 문제를 숫자만으로는 설명하면 실감나지 않을 것 같아 잠깐 예를 들어보자. 중형 아파트 한 채의 공간을 물로 꽉 채우면 대략 230톤의 부피가 나온다. 그러나 발 딛을 틈 없이 공간을 곡물, 채소, 고기 등으로 채운다면 대략 170톤의 식량을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층에 4가구를 배치한  15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식량 1만톤을 저장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현재 세계 인류의 평균수명을 후하게 쳐서 77세라고 가정할 때, 해마다 15층짜리 중형아파트 건물 1백만 채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어치우며 생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질과 양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적어도 1/3이 축산물로 채워지고 있으므로 축산인의 수고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물론, 곡물 재배자와 어부도 식량조달의 큰 기여자들이다.
이론상으로는, 지구생태계가 자연조건에서 인류를 먹일 수 있는 한계가55억명 정도이지만 초과된 40%의 간격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해결해 왔다. 그러나 이 방법도 이제는 버티기 쉽지 않아서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사람의 생존지속성이 단절된다. 즉, 우리가 이 터에서 지속적으로 살기 어렵다면, 다른 행성의 자원을 이용하여 살아야 하므로 우주개척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인류 생존의 한계점과 전환점에서 우리의 행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핵전쟁’이라는 순간적인 공멸의 수단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진정 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인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끊임없는 전쟁의 세월을 보내면서 종족들의 흥망이 이어져 왔으며, 세계 2차대전 이후 강대국들이 으르렁거리기만 하면서 다소의 국지전은 벌였으되 큰 전쟁 없이 반세기 이상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 이상한 세월이다.
전쟁은 누구든지 원하지 않는 재앙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이 불행한 사태가 인류 개체수를 자가 조절 해 온 면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 철학자들은 요즘을 폭풍의 전야와 같이 이상한 시대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체들은 끊임없이 투쟁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모양은 조금씩 달라졌어도 모든 나라들이 내부적인 권력다툼과, 업종 간 또는 개인 간 경쟁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역사를 쓰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더 큰 타격을 받지 않은 채 존재하는 우리는 참으로 미묘한 순간에 살아있으면서 날마다 다가오는 수많은 인연의 물결을 헤쳐 나가고 있다. 
인구가 늘고, 거리마다 사람의 물결이 차고 넘치더라도 같은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인연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숫자로 보면, 흔하디흔한 것이 사람인 듯해도 한 사람의 생명이 만들어 지려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생명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하며, 빛을 볼 때 까지 넘겨야 할 고비도 엄청나게 많은 것이 출산에 숨겨진 사연이다. 그래서 인명은 소중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어왔다. 기계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직 사람의 생물학적 특성을 모두 살려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공지능이 활개치기 시작하고 있는 현대이지만 기계가 자연인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는 여전히 숙제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추세라면, 머지않아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고, 밥 먹고, 극장가서 즐기고 심지어는 연애까지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주 반대하고 까다로운 진짜 인간보다 인공지능 로봇이 오히려 편리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더 높을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시절이 이러함에도, 한 사람이 평생 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수십억 인구 중 멀리서 직접 형체를 본 사람의 수는 티끌에 불과할 만큼 적은 수이지만, 그 중 눈이라도 마주 치고 지나간 존재는 또 훨씬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서로 말이라도 교환한 사람은 더욱 적으며, 대화를 반복하여 상대의 정체를 어지간히 알게 된 숫자는 한참 적은 인원이다. 나아가 친분을 맺어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범위를 좁히면, 한 사람이 평생에 알고 가는 사람은 실로 몇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얼마 전까지 자주 보다가 졸지에 타계하여 더 볼 수 없기도 하고, 대화할 때 호감을 가졌어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영영 재회도 못한 채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삶일진대, 자주 보고 지내는 이웃은 실로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즉시 서로 알아보는 존재들은 아주 깊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 볼 때, 같은 업계에 종사하면서 수차례 만나게 되는 이웃은 진정 존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까닭이 이러하므로, 우리는 이웃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간관계란 미묘하여 너무 가까우면 갈등과 대립이 생긴다. 서로 잘 모를 때에는 문제되지 않던 일도 너무 가깝다보면 갈등요소로 번지기도 한다. 이 상황에 대한 묘약은 ‘존중과 배려’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처럼 잘 되던가? 자신은 아무리 악의 없이 행한 일일지라도 사연이 꼬여서 상대에게 서운함을 줄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이 흐름은 국가 간에도 존재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일간 정치관계나 무역마찰은 이러한 점을 반증하고 있다. 이 악재가 잘 풀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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