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일)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연재

<축산과 농업 그리고 농촌의 미래!><61> 유업체 횡포 막아낸 낙농가 결집력

투쟁·착유관리 역할 분담…집단행동 무력화 대응

  • 등록 2017.06.28 11:35:07
[축산신문 기자]


문홍기 명장(장흥축협조합장)


그 시절은 슬레이트의 위험한 독성을 몰랐기에 슬레이트 위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던 시절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 8월의 뜨거운 햇빛 아래 방독면이나 방제복도 없이 돈사지붕의 슬레이트를 해체해 나가는데 밑에서는 죽은 돼지의 썩는 냄새가 나고 돈사 앞에 놓아두었던 벌통 때문에 꿀벌이 어지럽게 날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주사료공장에서 많은 인원이 지원해주니 용기가 솟았다. 그 당시는 먼 거리에 식사배달도 없었고 점심식사 대책도 없이 슬레이트를 뜯어내고 목재를 해체했다. 햇빛이 하도 강렬하니 주인도 못 견디고 들어갔지만 직원들과 나주공장 직원들은 끝까지 해체작업을 함께하여 기어이 그 날 해체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8월 15일 휴일 날 누구하나 불평 없이 합심하여 강인한 마음으로 해체작업을 완료했고 이와 같은 일은 축산을 아는 직원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마음으로 뭉쳐지는 것 이었다.
그때만 해도 농경문화 속에서 살아온 정신이 베어 있는 함께함과 나눔과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는 세대들이었다.
축산 현대화 과정에 있었던 때 가장 어렵고 힘든 직업의 하나가 낙농농가였다. 365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명절날도 가족의 애경사가 있는 날도 하루도 빠짐없이 젖을 짜고 빈틈없는 사양관리를 해야 했다. 더구나 기계화가 안 되던 시절이라 중노동이었고 규모가 작으니 가족노동이었다.
 소규모 낙농농가들이 많았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낙농이 늦게 시작된 남부지역에는 H유업에 우유를 납유 해 왔다. H유업은 국내 유명기업 이었으나 창업 2세대들이 기업을 분리하여 별도 운영하게 되면서 횡포가 시작되었다. 유대를 자주 지연시키면서 지급해오다 마침내 계속하여 납유는 받으면서 농가에 유대지급은 하지 않으니 농가들은 도산 위기에 몰렸다.
이유인 즉, 농가들에게는 유대를 지급 않고 해외투자를 하였는데 잘 풀리지 않아 유대지급을 몇 달째 계속해서 안하는 것이었다. 농가들은 계속해서 유대를 빼앗겨도 납유를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갑과 을의 관계였다.
또한 회사에서는 교묘한 수법으로 회유하고 교란시켜 집단행동을 무산시켰다. 농가들은 무력해졌고 절망을 느꼈다. 농가들은 몇 번 회의를 하고 더 이상 속지 말고 단합하여 유대를 빼앗기지 말고 집단행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본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본사에는 경찰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어서 농가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농가들은 젖을 짜야 하고 소 사료를 주고 사양관리를 해야 하니 또 다시 빈손으로 돌아오는 행사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우유는 어쩔 수 없으니 다시 곧 지급한다는 말을 믿고 납유를 해야 하는 일을 되풀이 했다. 농가들은 새롭게 회의를 해서 일부는 회사로 진격하고, 일부는 남아서 사양관리를 같이 해주기로 하고 다시 본사로 진격했다.
경찰대에게 한 맺힌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며 순수하게 대화로서 해결하겠노라고 설득을 했다.바리게이트를 열어주고 대표농가들은 회사로 진입했다. 회사로 진입한 농가들은 그들의 태도에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오며 초창기 낙농의 모진 고생을 해왔던 농가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분노가 폭발한 농가들은 그들을 우롱해 왔던 회사대표자와 간부들을 무릎 꿇게 하고 법적인 서류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 후 한 낙농가의 어린아이가 불장난을 하여 겨울철 젖소에 먹일 볏짚을 모두 태워버렸다. 농가들은 각자 자기 젖소에 먹일 볏짚 일부를 덜어다 화재 농가의 볏짚을 채웠다.
어떤 낙농가에서는 부인이 당뇨에 걸려 마침내 실명을 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소관리가 떨어지니 목장의 수익은 급감하고 부인치료비에 농가는 급속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안타까운 현실의 농가를 알게 된 지역의 한 낙농가가 비참한 농가에 희망을 주자고 부인과 상의해서 고능력 착유소 한 마리를 싣고 부인과 함께 가서 농가를 위로하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주고 왔다. 그 당시 착유소는 한우가격의 2배가 넘었다.
그 후에 다시 그 농가를 방문했을 때는 더 비참해져 있었다. 돌아와 부인에게 애기를 봐주려면 애기엄마가 올 때까지 봐주라고 했으니 한 마리를 더 주자고 설득했다.
이번에는 미경산 암소를 갖다 주고 먹일 볏짚도 한 차를 실어다 주었다. 남이 알지 못하게 일체 말하지 못하게 했다. 농경문화 속에 살아온 흙수저들의 마음인 것이다.      
농경문화는 자연의 순리로 이어온 역사다. 필자의 고향은 보성강 상류 시냇물이 맑게 흐르던 곳이었다.
어릴 적 봄철 비가 많이 내린 뒤에 시냇물 물길을 돌리면  강물을 따라 올라왔던 그 많은 물고기들이 퍼덕거렸다. 옹달샘이 있는 산골짜기까지도 민물장어가 많았다. 가을이면 누나와 함께 민물새우(토화)를 도랑에서 넘치게 잡았다. 새우잡던 조랭이에 큰 자라가 들어있을 때도 있었다. 풍요로운 자연의 천국이었다.                
시멘트 보를 막으며 어도(고기가 올라오는 물길)가 끊기고  물고기는 지금도 올라오지 못하고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강진만으로 빠지는 탐진강은 은어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시멘트로 보를 막으면서 생태계가 파괴되어 뒤늦게 어도를 만들었지만 은어는 보기 힘든 멸종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은어는 회귀성 어종으로 민물고기 중 유일하게 비릿내가 나지 않고 은어를 많이 잡은 분들은 은어가 있는 곳에는 물가에서 수박향이 나고 그곳에 은어떼가 모여 있다고 한다. 한참 은어가 잡힐 때는 그물을 들어올리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