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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성우 박사의 ‘相生畜産’ / 89. 한독목장의 설립과 역할

농가 소득 향상·국민 건강증진 일환 서독서 목장 건립 지원
매년 40~50두 암송아지 생산 분양…낙농발전 기여

  • 등록 2019.05.02 20:14:55


(전 농협대학교 총장)


▶ 한독낙농시범목장(韓獨酪農示範牧場)이 설립된 경위는 이렇다. 1964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의 뤼브케(Heinrich Lubke) 대통령을 공식 방문했다. 당시 우리는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있었으며, 한국과 서독 간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친선방문의 성격을 띤 방문이었다. 서독 방문기간 중 한국의 국가 발전을 위한 의지를 높게 평가한 뤼브케 대통령은 낙농시범목장 건설을 서독이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받아들여 사업이 추진되었다. 양국 간 합의한 내용은 목장 설립 부지는 한국정부가 마련하고 서독정부는 젖소수입과 각종 기자재 일체를 공급하며 기술자(초지, 사양, 농기계, 수의사)를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독정부가 토지 이외의 모든 자금을 무상원조하는 것으로서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국내 일부 인사들은 서독차관을 들여 온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데 무상원조가 맞다.  


▶ 양국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1964년 우리나라의 낙농업을 보면 1천87농가가 5천199두의 젖소를 사육했으며 농가 호당 평균 사육두수가 4.8두에 불과한 아주 영세한 규모였다. 한국에서는 사업주체로 농협중앙회가 선정되었고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의 신두리, 웅교리, 정봉리 일대의 땅 매입에 들어갔다. 이 지역은 구릉지 야산지역으로 목장 용지로는 최적지였다. 이시기는 낙농장려 10개년 계획(1962~1971)이 추진되고 있던 시기였고 양국 대통령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업이어서 추진이 원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공사 중에도 서너 번을 방문하여 진행상황을 점검했을 정도였다니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서독에서 건축자재, 장비 그리고 농기계가 들어왔다. 필자가 1976년 목장에 부임했을 때 처음 보았던 것들을 기억해 보면 지원된 기자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사 자재로는 소를 잡아매는 스탄치온,  우상(牛床) 고무매트, 송아지 케이지, 착유장치 일체, 우유통, 바켓트, 우유냉장탱크, 온수기, 온열등, 수의장비 일체 등 거의 모든 자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목초지 관리장비로는 대형 트랙터가 2대, 중형이 2대, 그리고 트랙터 부착 작업기로 쟁기, 로터리, 목초 파종기, 풀 베는 기계,  풀 뒤집는 기계. 풀 모으는 기계, 건초 결속기, 페이로더, 불도저, 퇴비살포기, 액비살포기, 비료살포기, 농약살포기, 사일리지 초파, 사일리지 트레일러 등 처음 보는 기계가 대부분이었다. 농기계를 수리하는데 쓰이는 공작실에도 선반, 커터, 드릴러, 용접기, 공기주입기, 연마기 등 거의 완벽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젖소는 당시 유럽산은 구제역 때문에 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캐나다에서 젖소 임신우 200두를 들여왔다고 한다. 도입에 소요된 자금은 물론 서독정부가 부담했다.  


▶ 한독낙농시범목장의 설립 취지는 ‘우리나라의 낙농산업을 발전시켜서 농가소득을 높이고 국민들에게 우유를 많이 먹여서 건강을 증진시키며 나아가 유제품의 수출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산업분야이든 성공적인 사업 모델은 벤치마킹의 본보기로 널리 활용된다. 그러므로 이름에 있는 대로 ‘낙농의 시범’을 보여서 낙후된 축산업을 진흥하고 농가소득을 증진한다는 거였다. 그러면 당초의 목적대로 운영이 되었고, 소기의 역할을 다 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 한독목장이 준공된 1969년에 우리나라의 낙농업은 아주 초창기여서, 많은 소규모의 낙농가들이 서울 부산 경기 등 대도시 변두리에서 젖소를 사육했고, 각 도에서도 주로 도청소재지 등 대도시 주변에서 사육했다. 그 해 전국의 낙농가수는 2천322농가, 젖소두수는 1만8천820두로 호당 평균 8.1두로 영세했다. 5년 전보다 낙농가수가 1천235호, 젖소두수가 1만3천621두씩 늘기는 했지만 호당 사육두수는 아직도 영세하기 짝이 없었다.


▶ 한독목장은 성우(成牛) 200두 규모(총 두수는 350여두)의 목장으로 매년 170여 마리의 송아지가 생산됐다. 한 해에 암송아지가 85두가 생산되는데, 노폐우 대체용으로 30~40두를 제외하면 매년 40~50여두의 암송아지를 분양할 여력이 생기므로 농가 분양을 실시했다. 당시에는 젖소 두세 마리만 젖을 짜도 소득이 높아서 형편이 핀다고 할 때였다. 목장의 위치가 안성이므로 일부 두수는 이 고장 농가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지역이 낙농주산지가 된 이유다. 해마다 전국 각지로 분양된 한독목장의 소들이 그 지역의 낙농 발전과 농가 소득 증대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독목장의 사업 중 중요한 분야는 선진낙농 기술보급이다. 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낙농산업은 초창기여서 사육 규모가 영세하고 농가들의 기술수준도 낙후되어 있었다. 한독목장에서는 매년 농업고등학교 졸업생 20명을 선발해서, 낙농목장경영에 관한 이론과 실습 교육을 하는 6개월간의 장기 낙농연수과정을 실시했다. 각 도에서 2~3명씩 선발했는데, 선발기준은 앞으로 낙농목장을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교육 이수 후 규모가 큰 낙농목장에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장기연구과정은 무료인데다 교육내용이 충실하다고 소문이 나서 매우 인기가 좋았다. 연수생 숙소는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허름한 기숙사였지만 교육생들은 별다른 불평 없이 교육을 받았다. 당시 교육수료생들 중에는 자신의 목장을 차리거나 부모가 경영하는 목장에서 후계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큰 규모의 목장에 책임자로 발탁되어 가기도 했다. 한독목장의 장기연수과정은 선진낙농 기술보급을 통해 한국 낙농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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