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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30주년 창간기획>축산인의 삶 보기

경기 이천 ‘정오농장’ 한우인 김상욱 부부

[축산신문 장지헌 기자] 

 

축산인의 삶을 엿보고 싶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축산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축산인의 삶,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단 몇 시간의 인터뷰와 겨우 한나절 축산 현장을 살피는 것으로 축산인의 삶을 안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축산인의 삶, 그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찾아 맞춰가는 마음으로 축산인을 만났다.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구시리, 정오농장 김상욱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스스로 선택한 길…성공에 이르는 키워드는 성심”

 

일찌감치 축산 시작…열정 다해
방역 철저했지만 FMD에 망연자실
빈 우사에 한동안 소 우는  환청

축산은 생물 다루는 일
흔한 부부여행 한번 제대로 못가
그래도 눈뜨면 할 일 있어 행복

 

김상욱 부부는 익히 알고 있는 한우인이었다. 한우 사양관리는 물론 개량과 생산비 절감 등 여러 분야에서 모범이 되는, 젊고 미래가 기대되는 한우인으로 기억된다. 농장 입구에 위치한 평범한 주택의 거실에 셋이 앉았다. 인터뷰 주제가 ‘축산인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말하자, 김상욱 대표는 “그런 주제라면 축산 경력이 적어도 30년이 넘고, 나이도 60세가 넘는 사람에게 적당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40대 젊은 축산인이 말하는 삶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복합영농 하다 한우사육만 집중
김 대표는 축산인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 대표는 일찌감치 축산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낙농을 하던 부친을 여의고 난후, 고등학교를 농고, 대학교를 농업 전문대학으로 진로를 잡았다. 전문대학 졸업과 동시에 낙농과 복숭아, 느타리버섯, 벼 등 4개 작목으로 소위 복합영농에 나섰는데, 그 이유가 귀에 쏙 들어온다. 사계절 돈을 만져 보자는 것이었다. 농민으로서 성공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복합영농은 1998년 영농후계자로 지정, 만삭 한우 11두를 입식하면서 작목의 비중이 축산으로 기운다. 버섯 농사, 복숭아 농사를 차례로 접고 2005년부터 한우 사육에 집중 투자했다. 논농사 1만평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그를 지칭하는 직업은 전업 축산인이다. 2009년에는 건국대학교 친환경인증센터로부터 무항생제 농장으로 인증 받는 등 순탄한 축산인의 길이 계속됐다. 그러나 그에게도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11년 전국 휩쓴 FMD로 전두수 살처분
2011년 전국 축산인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FMD 때문이었다. 당시 김 대표는 축산인으로서 FMD 방역을 위해 현장 축산인이 지켜야 할 매뉴얼 그 이상으로 엄격하게 방역에 임했다고 한다. 백신을 하고, 이웃 농장과 접촉을 금함은 물론 아예 농장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갔다. 혹시 새가 날아와서 전염시킬까봐 한 겨울에 새 쫓기에 바빴다는 회고다.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백신한 지 4~5일 지난 어느 날, 소 한 마리가 사료를 잘 먹지 않아서 입안을 살펴보니 이상 징후가 보였고, 신고 후 3일만에 170마리를 모두 땅에 묻었다는 것이다.
인터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김 대표는 “내 청춘을 묻었다”고 했다. 소를 묻은 이후 한 달 동안 소가 우는 환청을 들었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았을 땐 가슴 아팠다고 했다.
축산인, 그들이 키우는 가축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소, 돼지, 닭 등을 열심히 키우고 팔아 생계 수단으로 삼는 게 사실이지만, 축산인이 가축을 대하는 마음은 비축산인들이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대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한우 현장에 가 보면 ‘소 사료 준다’는 말보다는 ‘소 밥 준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람에게 밥을 주듯, 축산인들은 그렇게 가축을 가족처럼 대하며 그 때마다 대화를 나눈다. “아프지 말고 잘 커라”며 쓰다듬어 준다. 굳이 동물복지를 말 할 필요가 없다. 가축을 가족으로 여기고 대화를 나누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동물복지다. 이렇듯 가족 같은 가축을 하루아침에 묻었으니 그 축산인의 충격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하랴.
그래도 또 축산이다. 입식 자금을 지원받아 빈 축사를 채웠다. 그런데 이제 FMD 이전과는 좀 달라졌다. 사양관리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지만 왠지 다르단다. 이를테면 FMD 이전에는 소 한 마리, 한 마리 생김새를 다 기억했는데 이제는 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를 사육하는 열정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뭐가 뭔지 모르지만 달라졌다는 것은 아마도 FMD 충격이 그만큼 컸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4년만에 겨우 회생 기반 마련
재입식은 단순히 소를 빈 축사에 채우는 일이 아니다. 번식우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사람이 남의 집에 가면 잠을 편히 못 자듯, 소도 사육 장소를 옮기면 적응 기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김 대표는 그 적응 시기를 1년으로 잡았다. 1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발정도 제대로 안 되고, 수태도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입식한지 올해로 4년째 이제 겨우 번식과 비육이 일관되게 돌아가는 시스템이 자리 잡혔다. 6개동의 축사(분만우사 3동)에서 번식우 90여두와 거세비육 90여두를 사육하는 규모다.  별도의 고용 노동 없이 부부가 감당한다. 그동안 고생한데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소 값도 좋다. 이제 웬만한 직장인 부럽지 않을 것 같은데, 김 대표 부부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부정도 긍정도 아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직장인과 비교, 장단점을 말해 달라고 했다.
“단점은 생물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농장을 비울 수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여행을 제대로 못해 봤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어 장점을 말하는데 그 대답이 짠하게 들린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반드시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할 일이 있다는 그 자체를 장점으로 꼽았다.
축산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인가. 취미 생활은커녕 부부와 함께 여행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가축을 보살피고 키우는 일,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그런 삶인가. 여기서 더 이상 축산인으로 산다는 의미를 따질 필요는 없으리라.
이쯤에서 식당에서 주문한 식사가 배달됐다. 오징어와 삼겹살 볶음요리다. 좀 긴 인터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때문일까. 김 대표는 이를 감안하여 점심 식사를 이렇게 준비한 듯하다. 순간 이 농장을 방문하여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을 현장 축산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부담되는 시간이었을 터, 농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축산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은 나만의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 한 삼일 머물며 심층 취재하겠다는 계획을 접었다.
인터뷰에 이어 소 사육 현장을 둘러보고 김 대표의 오후 일정을 좇아 가봤다. 첫 번째 일정은 이천시농업경영인회 사무실을 들리는 것이었다. 김 대표가 이 농업경영인회 회장이기 때문이었다. 2주일 전 이천시농업경영인회 체육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뒷 얘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농업경영인회장으로서 꼭 해내고 싶은 것이 자연순환농업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1주일 전 그 일로 일본 농업현장에 다녀왔다며 일본에서는 축분으로 만든 유기질비료를 논에 뿌리는데 그 절차가 까다롭지 않고 규제도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독일의 한 축산현장을 살필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축분 퇴비장이 그 농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시설로 인식하고 있음을 인상 깊게 봤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이렇게 축분을 폐기물이 아닌 자원으로 인식하고 실제로 축분을 자원으로 제대로 활용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면(이천시 대월면) 단위에서라도 꼭 성공시켜 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다음은 이천시 한우협회로 향했다. 몇 번 가본 곳이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사료 공동구매와, 생균제 원가 공급등의 사업, 적극적인 가축개량과 이력제 참여 등 모범적인 지역 한우회다. 사무국장(이재하)과 관계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한우인의 날 행사와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축산관련 조직이 어떠해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김 대표는 다시 소에게 밥을 주기 위해 농장으로 향했다. 약 두 시간 정도 지나서야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 자리로 옮겼다. 이동 중에 오늘 취재 내용을 정리하며 축산을 천직으로 받아들이냐고 물었다. 김 대표의 대답은 천직, 운명이라는 표현보다는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고 말했다. 천직이니 운명이니 하는 표현은 왠지 수동적인 것 같아 싫다는 것이다. 내가 가야할 길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로 들렸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그가 하는 무슨 일이든 성심을 다했고, 그것은 곧 성공을 담보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이어진 식사 자리를 함께한 한우인들도 한결같이 김 대표의 성실하고 부지런함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

 

>>일문일답

“정직하게 일하면 상위 10% 가능”

 

김상욱 대표의 축산에 임하는 신념 등 궁금한 것 몇 가지를 일문일답으로 간단하게 정리한다.

-축산에 임하는 신념이 있다면.
“매일 하는 일이지만 관심을 더 갖자는 것이다. 축사를 한 바퀴 돌아보더라도 관심을 얼마나 가지느냐에 따라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축산 경쟁력을 점수로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 90점이다. 상위 10%를 자신한다. 내가 일한 결과에 자부심을 갖는다.”
-아들(장남이 여주농고 재학중)이 축산을 하겠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정직하게 하면 된다. 남 탓하지 말고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빠트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상위 10%안에 들 수 있다.”
-부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데 대화의  주제가 궁금하다.
“여느 가정이나 다름없다. 아이들 이야기가 많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소도 자식처럼 1번 소는 어떻고, 2번 소는 어떻다는 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에게 아내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동반자다.”

 

>>부인 윤옥순 씨는

손색없는 ‘내조의 여왕’

 

김상욱 대표의 부인 윤옥순 씨는 1974년생으로 김 대표와 동갑내기다. 김 대표가 후계자로 지정되던 해인 1998년 결혼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며, 김 대표와 슬하에 아들 둘(정오, 정환)을 두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윤 씨를 ‘내조의 여왕’으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천한우협회 이재하 사무국장이 사례를 들어 보충 설명을 해줬다.
이 국장이 “남편이 올해 농업경영인회장에 취임했는데 연임하지 말고 빨리 축산현장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지요”라고 했더니, 윤씨는 “연임해도 괜찮다. 남편이 좋아서 하는 일이면 나도 좋고, 남편이 잘되는 일이 내가 잘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농장 현장에서도 훌륭한 내조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꼼꼼한 기록이 눈에 띈다. 매일 농장에서 일어났던 일, 남편이 한 일 등을 기록한다. 축산경영에서 기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농장 일의 뒷마무리도 그녀의 몫일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정오농장 경쟁력 그 중심에 윤 씨등 가족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음은 직문즉답.
-나에게 한우란.
“돈”
-나에게 남편이란.
“내꺼”

 

>>에필로그-막전막후

일상의 취재…하필이면 교통사고라니

 

축산인의 삶 보기, 그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대상에 올려놓고 고민하다 젊은 축산인으로서 FMD 시련을 겪으며 축산정도를 걷고 있는 김상욱 대표를 선택했다. 당초 ‘축산인의 삶 보기’란 기획에 걸맞게 3일 정도 축산인과 숙식을 함께하며 축산인의 삶을 좀 더 가까이 보려고 했으나 준비 부족으로 하루 취재로 그쳤다.
이천한우협회를 방문하고 농장으로 돌아오던 중 우리가 탄 트럭이 농로 사거리에서 옆구리를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차량을 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사고였다. 연출될 수 없는 축산인의 삶, 그 일상에 하필이면 교통 사고라니….
김 대표 부부와 한우협회 윤상헌회장, 이재하 사무국장, 김 대표가 한우 멘토로 삼고있는 조영훈씨와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는 한우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취재에 협조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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