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중 환 농업연구사(농진청 국립축산과학원, 축산환경과)
1. 프롤로그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가축 사육환경의 개선과 동물복지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부에서도 지속가능한 축산을 위해 그 동안 논의에 머물던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국내에서 동물복지인증제도의 도입이 결정된 2011년, 해외에서는 또 다른 이슈가 생겨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EU에서는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동물복지를 강화하는 정책의 시행을 앞두고 있었으며, 다른 많은 국가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정책의 주요내용은 ‘2012년부터 산란계 케이지 사육금지, 2013년부터 분만틀 사용금지’이었는데 과연 27개 EU 회원국(현재 EU 회원국은 28개국) 전부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축산농가가 원할 경우 인증을 해주는 인증제도와 달리 EU 회원국 전체 축산농가들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이 기준을 강제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이다. EU의 동물복지 향상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졌으나 한편으로 과연 일반농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EU의 동물복지 강화 정책이 얼마나 준수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2. EU가 동물복지 선도한다?
2011년 여름, 헝가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헝가리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국력이 강성했으나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련의 세력권 아래에서 공산국가로 유지되었으나 이후에 차례로 NATO와 EU에 가입하게 되었다. 헝가리에는 유명한 건축물과 인물들이 다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리스트 음대와 부다왕궁이다. 리스트 음대는 유명한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뉴브 강과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부다왕궁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야경을 즐기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다. 특히 이곳은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로 유명한데 몇 해가 지난 시점이었지만 배우 이병헌의 일본 팬들을 기억하는 헝가리 시민들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고 한다.
최근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유람선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국가로 당시에는 헝가리어를 통역해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실 농업 전반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출장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헝가리 축산농가와 농업부를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헝가리의 축산업은 EU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낙후되어 있었는데 일반 축산농가들의 사육시설들은 우리나라의 80년대를 연상시켰다. 축산농가들의 대부분은 ‘가족농’이라고 불리는 농가들이었는데 가족 구성원들이 농사와 축산을 병행했다.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EU 회원국의 모습과는 달리 너무 초라한 축산농가의 현황을 접하고 무거운 발길로 헝가리 농업부를 방문했다. 헝가리 농업부는 중세 유럽의 느낌이 나는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출입문은 아치형의 큰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영화 속의 성문을 연상시켰다. 안내를 따라 들어간 회의장 안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헝가리 정부 관계자들과 마주앉고 보니 간편한 복장으로 방문한 우리들의 행색이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저런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여러 질의응답이 이뤄질 때, “2012년부터 동물복지 EU 정책시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헝가리 정부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냐?”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 질문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우리는 자체적으로 그 기준을 준수할 여건이 안 되며 현재도 매년 EU의 지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EU의 지원이 없으면 동물복지 준수를 위한 사육시설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고 덤덤하게 답변했다. 정책시행이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책도 없이 그냥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답변에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몇 번씩 복기(復棋)도 해보지만 아쉽게도 EU의 동물복지 정책은 그들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28개의 EU회원국 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는 몇 개나 되는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몇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생소한 국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들 EU회원국들은 각자 생활문화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경제규모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EU의 선도국가들을 방문하면 마트에서 동물복지 마크가 표기된 제품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동물복지는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여건이 좋지 않은 EU회원국들의 경우, 지원금에 의존에서 겨우 따라가는 형국으로 모든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 규정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 불만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물복지정책을 시행하고서 몇 차례 유예가 있었으며, 몇 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는지를 생각해보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헝가리 농업부 방문 시 정부 관계자들은 국내에서 발생한 구제역과 관련하여 자국의 돼지고기 수출을 위한 설명에만 열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돼지고기 수출은 시도도 못했는데 그 이유는 돼지품종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국내에서 요구하는 규격에 맞는 물량을 확보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3. 에필로그
EU는 2012년부터 기세 좋게 동물복지 정책을 시행했으나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형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양두구육이란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것으로 겉으로는 훌륭하게 내세우지만 속은 변변찮음을 비웃는 말이다. 이처럼 EU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동물복지정책을 온전하게 정착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회원국 간의 차이에 있다. 각 회원국별로 인식의 차이, 경제의 차이가 동물복지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규정하게 되며 이 한계치 이상의 규제는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도적인 일부 EU 회원국을 제외하고는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인식과 소비시장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규제를 적용하고 제재를 강화한다고 해서 모든 회원국들이 이를 준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U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상대의 겉모습에만 현혹되지 말고 실질적인 내부문제를 봐야 하는 이유는 선행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나라도 2012년부터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2019년 9월 현재까지 총 244개 농가가 인증을 획득했다. 동물복지에 대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전하고 있으나, 동물복지 인증제도의 안정적인 정착과 확산을 위해서는 사회인식 개선과 소비시장 활성화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명심하고 이를 발전시킬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