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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농

서울토박이가 선도 낙농가로…꿈★ 이룬 ‘귀농 1호’

“꼼꼼한 개체기록은 도태기준 지표” 지론…선도적 목장경영

[축산신문 조용환 기자] 

 

“꼼꼼한 개체기록은 도태기준 지표” 지론…선도적 목장경영
’68년 서울우유 조합원 가입…31년간 300만3천144㎏ 납유
종개협 1호 종신회원…국내 홀스타인품평회 정착 가교역할도

 

 

윤여창 원로(전 창령원목장 대표)

“농사꾼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정확하고 꼼꼼한 기록이다. 특히 낙농인은 사육중인 젖소의 철저한 개체별 기록을 토대로 도태기준을 마련하고, 현실과 미래에 적합한 투자와 경영이다. 서울우유조합원은 생산하는 유질이 곧 서울우유협동조합제품이며, 국제경쟁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체세포수와 세균수 모두 세계 최고의 양질의 원유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영농인의 귀감이 되고 있는 ‘귀농 제1호, 서울우유협동조합원번호 776번’ 윤여창 원로(91세·前창령원목장 대표)는 한국낙농가와 서울우유조합원이 앞으로 지향해 나가야할 방향을 이같이 강조했다.
서울 보성고와 서울농대 농생물학과를 1957년 졸업한 서울토박이가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귀농한 윤여창 원로를 당시 많은 영농인들은 ‘귀농 제1호’로 손꼽았다. 
윤여창 원로는 1962년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385.8m) 기슭 황무지를 개간하여 2년 만에 초지 3천평과 밭 3천60평, 과수원 780평, 젖소 20두, 돼지 24두 규모의 영농기반을 만들었다. 1964년 시흥군지정 민간인 종돈장으로 선정되었다. 새마을운동지도자로 지역개발에도 앞장섰고, 영농기술교류와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철두철미한 기록관리 생활화

특히 서울우유협동조합에 1968년 10월 5일 가입한 윤여창 원로는 원유를 1968년 12월 15일부터 1999년 5월 10일까지 냈다. 연월일로 따지면 30년 4개월 26일. 일자로 계산하면 1만1천921일이다. 이 기간에 낸 원유는 모두 300만3천144kg에 달한다. 
이러한 계산이 요즘은 컴퓨터가 있어 가능하겠지만 반

세기도 훨씬 전에 수기로 그것도 매일 개체별 유량을 산차까지 구분지어 기록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런데

꼼꼼한 기록과 중요한 사항(태어난 송아지 암, 수 구분과 소계, 합계)은 붉은 볼펜으로 눈에 띄게 또박또박 표기하여 한눈에도 알기가 쉽다. 
또 기록한 날짜의 축사온도와 착유시간은 물론 특이사항에는 첨가제로 급여했던 키토산 등까지 꼼꼼히 메모해 뒀다. 

물론 목장에서의 착유량기록부는 조합의 집유전표와 일치한다. 

윤여창 원로는 “당시 사육했던 젖소가 수 백 마리가 된 것도 아니었는데 못할게 뭐 있느냐?”고 반문하고 “아직도 많은 목장이 힘들다고 기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소를 감축시켜야 할 때 어떤 방법으로 도태기준을 설정하는가는 그 목장경영 성패의 척도”라고 강조한다.
생산된 송아지의 아버지는 다 다르다. 사료 잘 먹고, 새끼 잘 낳고, 자기목장 환경에 적합한 소인지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근친을 피할 수 있는 혈통기록은 뒷전으로 하고 무조건 가격이 비싼 정액이나 수정란을 선호하는 것은 문제라고 윤여창 원로는 지적한다.
윤여창 원로는 이어 “우유와 유제품의 관세제로 수입개방시한이 2년 앞으로 다가와 어려움이 보이는데도 낙농리더들은 대책마련은커녕 사육중인 두수가 많고 적음을 논하여 걱정”이라며 낙농지도자의 바른 자세를 꼬집었다.
 

 

도시화에 밀려 37년 목장경영 마감
윤여창 원로는 37년 동안 정착했던 목장이 도시화에 밀려 아파트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24년 전 목장을 접으면서 목장에 있던 앵두나무 한그루를 입주하는 아파트 입구에 옮겨 심고 오가면서 쓰다듬는다. 주인의 정성어린 손길과 애정에 화답하듯 앵두나무는 올해도 많이 열렸다.
윤여창 원로는 한국종축개량협회 제1호 종신회원이다. 
당시 상황을 윤여창 원로는 “1969년 1월 13일 한국홀스타인등록협회(한국종축개량협회 전신)에 가입할 때 1천원이었던 정회원의 연회비는 물가상승률에 따라 점차 올라 1981년에는 5천원이 되었으나 정회원의 회비납부 실적이 저조했다. 윤여창 원로는 10년 동안의 정회원비 5만원을 납입하면 평생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종신회비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종축개량협회장은 농림수산부 축산국장을 역임했던 고 황영구씨가 했는데 반대여론이 심했다 한다. 그 이유는 1년 회비도 납부하지 않는데 10년 회비(종신)를 납부할 회원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여창 원로는 이미 종신회비를 만들어 운영하는 모교동문회(서울농대 농생물학동문회)의 성공한 사례를 들어 강력히 주장하여 오늘날 한국종축개량협회가 발전하는데 있어 주춧돌 역할을 하는 종신회비제도 도입의 배경이다.
한국종축개량협회 이재윤 회장은 “대부분의 협회들이 정회원비로 운영되어 본 협회도 회비로 운영되다 보니 초창기 어려움이 많았으나 종신회원제도가 도입되고 활성화되어 협회의 살림살이가 숨통이 트였으며 지금은 별도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면서 “협회원 7천500명 가운데 종신회원의 비율은 5월 현재 95%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윤여창 원로는 1973년 일본북해도낙농학원대학과 기술교류협정을 체결, 아시아낙농교류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선진영농정보와 기술을 도입, 보급해왔다.
특히 1979년 일본 마찌무라, 구로자와, 호소다목장 등과의 인연으로 북해도 홀스타인공진회에서 최고 영예의 상인 그랜드챔피언을 수상한 축주에게는 한국을 대표하여 한국종축개량협회에서 마련한 도자기를 1992년 9월부터 1998년까지 7년 연속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1989년 고능력젖소평가경매행사(한국홀스타인품평회 전신)가 개최되고, 30여년이 지나면서 정착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35년 전 국내 젖소매매가격은 혈통과 능력이 기준이 되지 않고 중간상인이 젖소 엉덩이 두들겨가면서 흥정하던 때로 낙농선진국의 상황과는 대조됐다. 따라서 윤여창 원로는 당시 한국낙농경영협의회장을 맡은 고 김태신씨 등과 우리 회원끼리라도 각자 목장에서 좋은 소를 출품하자. 힘이 부치더라도 우리끼리 주고 사는 단순한 방식으로 경매행사를 시작하여 낙농가들에게 개량에 대한 의욕을 북돋워 주자. 개량농가가 점차 참여하여 평가대회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 4반세기가 지나면서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윤여창 원로는 평가했다. 
윤여창 원로는 1990년 10월 26일 일본 북해도 구마모도에서 열린 ‘제8회 全일본홀스타인공진회’에서 최고영예의 상인 그랜드챔피언을 수상한 청수목장 주인에게 한국을 대표해서 트로피를 전달했다. 훗날 청수목장은 북해도의 유수목장인 마찌무라, 구로자와, 호소다목장 버금갈 정도로 유명해져 윤여창 원로는 한국의 낙농연수단 일행과 청수목장을 방문했을 때 그 공을 청수목장 안사람의 공으로 돌리고, 격려를 해줬다고 귀띔했다. 
윤여창 원로는 자립·과학·협동의 3대 정신을 바탕으로 50년 동안 펼쳐온 새농민들의 발자취가 생생히 녹아있는 ‘새농민 50년사’를 2017년 발간할 때 題字(제자)와 감수를 맡았다.
윤여창 원로는 “보통 10년이 지나면 기록이 거의 폐기된다. 50년의 역사와 흔적을 찾는데 2년을 고생했다”면서 “다행히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발간된 책자가 앞으로 농축산인과 자라나는 2세 농업인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일독을 권유했다. 


농촌지도자로 헌신적 노력

‘새농민 50년사’는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사회적 위상을 굳건히 한 정신과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양적팽창과 함께 질적 향상을 이룬 시기,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선도농업인 단체로 거듭나는 과정 등을 알기 쉽게 서술했다.
윤여창 원로는 1969년 농촌지원지도자 업적상(경기도지사)과 1971년 새마을지도자로 도시근교 마을의 환경사업으로 경기도 우수마을로 지정, 1972년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1977년 농협중앙회가 선정하는 ‘새농민 과학상’을 수상 후 전국새농민회 5∼7대 회장을 지냈다. 97년부터는 국립 한국농업전문학교(국립한국농수산대학 전신) 운영위원으로 재학생들을 일본과 미국 등 해외에 영농실습을 시키기도 했다.
이들이 자택을 방문하면 윤여창 원로는 “국민세금으로 배웠다면 앞으로 지역의 농축산업 발전과 한국 농축산업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하고 “붓글씨로 過猶不及(과유불급)을 써서 유언처럼 주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국립한국농업전문학교 1기부터 관여한 윤여창 원로는 현재 27기가 나온 농수산대학 졸업생들에게 인생의 절반도 못 살았기 때문에 중심을 잘 잡고 현업에 충실할 것을 주문한다는 것이다.
“농촌사회는 특히 축산은 협동을 해야만 한다. 좋은 점은 서로 공유하여 더 좋은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자기모순에 빠져 이웃에게도 안 가르쳐 주는 것이 맹점”이라고 일부 축산인을 질책하는 윤여창 원로는 재단법인 일가재단의 ‘일가상’도 수상했다. 김정자씨(87세)와의 자택은 안양시 동안구 흥안대로 223번길 47 샘마을 한양아파트. 

 

축산신문, CHUKSA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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