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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남성우 박사의 ‘相生畜産’ / 24. 한우사육의 역사와 개량 (2)

조선시대 한우, 소중한 가축으로 엄격한 보호관리
일제강점기엔 혈통 보전…증식 정책 본격화

  • 등록 2018.08.06 10:02:08


(전 농협대학교 총장)


▶조선왕조시대에는 소가 농업에 중요한 가축이므로 도살금지정책을 실시했다. 태조가 1398년에 처음 우금령(牛禁令:소도살금지령))을 내린 이후 역대 왕들은 지속적으로 우금령을 내렸다. 태조는 사축서(司畜署)를, 태종은 전구서(典廐署)를 두어 축우를 관리토록 했다. 세종 원년에는 우유소(牛乳所)를 설치해 한우의 젖을 음용토록 했고,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해 농사방법을 전파하는 한편 구비(廐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조는 전생서(典牲曙)를 두고 양우법(養牛法)을 편찬해 소의 개량과 증식을 권장했고 “민(民)은 논이 아니면 생활할 수 없고 농(農)은 축우가 아니면 경작할 수 없으니 소의 가치는 실로 크다”라고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성종 때는 마의방(馬醫方), 우의방(牛醫方)을 완성해 말과 소의 질병관리에 활용토록 했다. 중종은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을 완성했는데 이는 소, 말, 양, 돼지의 전염병 치료방법을 기술한 전문서적이다(당시 우역이 발생한 이후 영조 때까지 200년이 넘도록 우역이 반복 발생했음). 영조는 식용으로 도살하던 소를 돼지로 대체토록 명해 축우를 보호했으며, 전염병이 돌자 예조에 명해 각 지방에서 목신위(牧神位)에게 위령제를 지내도록 했다. 철종은 소를 애호하는 뜻에서 약원(藥院)에서 진상하는 낙죽(酪粥)을 중단토록 명했다. 이토록 축우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각별한 것을 보면 소의 가치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임금들은 이른 봄에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농신(農神)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소를 바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선농단 제사 후 희생소를 탕으로 끓여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고 여기에서 ‘설농탕’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소고기와 뼈를 고아서 나온 뽀얀 국물이 눈처럼 희고 진하다고 해 설농탕(雪濃湯)이라 했고 후에 설렁탕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고종 43년(1906년)에는 수원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치해 농업을 권장했는데 이는 오늘날 농촌진흥청의 전신이다.


▶ 고대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소에 관한 여러 가지 사료를 볼 때, ① 한우는 소중한 가축으로 보호정책을 펴고 엄격히 관리했다. ② 제천(祭天)시 소를 제물로 바쳤다. ③ 주로 농사·운반용으로 활용했으며 도축을 엄격히 금했다. ④ 식용으로 쓰기는 했으나 특수계층만 가능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 한우증식을 농정의 4대 기간목표로 정하고 보호·육성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는 경종농업과 일본으로의 반출을 위한 것이었다. 1912년 총독부령으로 ‘축우의 개량증식에 관한 사항’을 시달, 본격적인 증식정책이 추진되었다. 1914년에 외국산소[洋種] 와의 교잡을 금지해 혈통보전을 추진했다. 1916년에 ‘보호우 규칙’을 제정해 지방장관이 보호우를 선정하고 소유주에게 보호료를 지원토록 했다. 1917년에 거세장려시책을 1921년에는 한우개량시책을 시행했고 1938년에는 한우심사표준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 우리나라 최초의 1910년도 가축통계에 의하면 축우 70만두, 마필 4만두, 돼지 76만두, 닭 400만수로 조사되었다. 이후 계속된 증식정책으로 한우두수는 1920년에 149만두로 10년 만에 배로 늘었다. 계속해서 1930년에는 161만두, 1940년에는 174만두를 기록했으나 1945년 해방 시에는 59만 7천두로 크게 줄었다.


▶ 1940년 이후 사육두수가 줄어든 이유는 ①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시 군수물자로의 공출(供出)과 ② 일본, 러시아, 중국으로의 수출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우수출 실적을 보면 구한말 18년(1892~1909)동안에 한우 12만두 우피 119만매를 수출했다. 1910~1921년(12년)간 한우수출은 38만 1천두(일본 28만 5천두 74.8%, 러시아 7.9만두 20.7%, 중국 1.7만두 4.5%), 우피수출은 276만매를 기록했으며, 1929~1941년(12년간) 한우수출은 85만 6천두(일본 91.9%, 러시아와 중국 8.1%)를 기록했다. 전체기간으로 보면 1892~1941년(50년)동안 한우수출은 구한말 18년간 12만두, 1910~1941년 사이 32년간 173만두로 추정된다. 이 기간 중의 한우수출은 오늘날처럼 무역으로 수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량 한우를 식용 또는 번식용으로 쓰기 위한 전략적 반출로 봐야 한다.     


▶ 해방이후 한우두수 변화를 보면 1945년(해방) 59만 7천두가 1950년에는 39만 3천두로 20여만 두가 줄었는데 6.25 전쟁의 영향이다. 이후 1953년에는 66만 8천두로 늘어났다. 휴전 직후인 1954년 ‘가축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한우보호와 증식에 노력한 결과 1960년에는 한우두수가 101만두로 늘어났다. 이어 1963년 ‘축산법’이 제정되고 한우 개량방향이 고기생산을 위한 육용우(肉用牛)로 수정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증식정책을 추진해 1970년 128만 4천두, 1980년 139만두 그리고 1985년에는 255만 3천두까지 증가했는데 이는 농가소득증대를 위해서 1982~1984년 사이에 외국산 육용우 11여만 두를 수입, 번식을 장려한 효과였다. 그러나 공급과잉이 되면서 가격이 폭락하자 사육을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났고 1990년에는 162만 1천두로 사육두수가 줄었다(육우도입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앞으로 FTA에 따라 관세가 계속 낮아지고 있어 사육두수는 현재보다(290만두 내외)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1998 한국축산발달사, 2017 한우문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