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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로 보는 공무원 수의사들의 현실

  • 등록 2025.11.26 11:02:43

 

김 충 현 교수
호서대 동물보건복지학과

 

필자가 교수가 되기전, 경기도 축산위생연구소(현 동물위생시험소), 인천시 강화군 축산과, 농림축산검역본부, 농식품부에서 20년 동안 공무원 수의사로 살았다. 축산신문의 논단위원이 된다면 꼭 쓰고 싶은 주제가 있었는데, 오늘 이 지면을 빌어 “사례로 보는 공무원 수의사의 현실”을 쓰고자 한다.

 

사례 1. 산업동물의 외면 – 현장에서 느낀 세대의 간극
필자는 안성 농협축산물위생교육원에서 약 5년 동안 도축검사원과 도축검사관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해왔다. 최근 교육원 직원의 요청으로 서울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수의학과 학생들에게 강의를 맡게 되었다. 수의과대학 졸업 후 수의사가 될 후배들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설렘과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했다.
강의 당일 아침, 수의학과 본과생답게 얼굴에는 피로의 그림자가 짙었다. 그러나 이론 강의가 시작되자 조금씩, 천천히, 그들의 눈빛이 살아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몰입의 공기가 강의실을 채웠다. 점심 식사 후 실습을 위해 하얀색 방역복을 처음 입은 학생들은 어색하면서도 신기한 표정으로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일회용 부츠를 제대로 신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습복으로 환복한 학생들은 도축장에서 공수한 소와 돼지의 내장을 실제로 접하자 놀라움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소의 거대한 내장에 압도된 눈빛, 폐와 간의 단단함의 차이를 살피는 손끝, 소화 장기 특유의 냄새에 반응하는 표정이 생생했다. 실습이 무르익자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정작 필자가 듣고 싶던 ‘수의사 공무원 분야로의 진로 고민’은 없었다. 결국 필자가 직접 물었다. 학생들은 잠시 관심을 보였지만, 대부분 소동물 임상을 중심으로 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다. 필자는 “혹시 소동물 임상에 지치거나 다른 길을 찾고 싶을 때, 공무원과 산업동물 분야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세대 수의대 학생들은 공무원, 제약회사, 사료회사, 임상 등 다양한 동물 관련 분야에서 주로 진로를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들은 소동물 임상 분야를 제외하면 다른 진로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대학원 진학조차 산업동물보다 반려동물 관련 연구로 쏠리고, 수의과 대학의 교수 채용 흐름도 그 방향을 따른다. 거대한 반려동물 시장이 수의사 인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형국이다. 결국 공무원 뿐만 아니라 산업동물 수의사는 서서히 ‘공동화’라는 이름의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사례 2. 변하지 않는 현장 – 가축방역의 그늘 속에서
지난 9월 중순, “지자체 가축방역 역량 제고를 위한 정책연구” 과제를 위해 경기도북부청사를 찾았다. 의정부로 향하는 길 내내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는 이미 사무관으로 승진해, 경기도 가축방역을 이끌고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서 느껴진 그녀의 단단한 태도와 전문성은 20년 세월이 빚은 결과로 보였다. 수없이 몰아쳤던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그리고 최근의 아프리카돼지열병과 럼프스킨이 그녀를 이렇게 성장시켜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20년이 흘렀지만, 수의사들의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수의사들은 농장을 돌며 직접 채혈하고, 그 혈액을 들고 밤새 검사실 불빛 아래에 앉아있다. 질병은 끝없이 달려오고, 방역 인력들은 그 뒤를 겨우 따라붙는다. 국가 재난형 질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상처뿐이다. 가축이 쓰러진 자리엔 눈물만 남고, 그 곁의 공무원들마저 지쳐갔다.
밤을 새우며 바이러스와 싸우던 직원이 과로로 쓰러지고, 살처분 현장에서는 피로 누적으로 인한 사고로 귀한 생명을 잃는 일도 있었다. 방역의 최전선은 늘 싸움터였다. 그러나 이 싸움은 명예보다 책임으로, 때로는 절망 속에서 이어진다.
20년 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의사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입사했던 이들은 그 당시엔 국가의 듬직한 방패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수의사 공무원은 필수가 아닌 선택, 심지어 마지막 대안 정도로 여겨진다. 남은 사람들은 점점 지치고, 젊은 수의사들은 떠나고 있다. 그 이탈의 파동은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사례 3. 변해가는 위상, 익숙한 씁쓸함
얼마 전,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연구관을 우리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 강연자로 초청했다. 그는 세균 전공자로, 박학다식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지닌 최고전문가이다. 강의에서 그는 국내 최초로 자신이 진단했던 질병 사례를 생생하게 소개해 주었고 학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강의가 끝난 뒤 오랜만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대화 끝자락에서는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이제는 농림축산검역본부에도 수의사 채용이 힘들어요.” 그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한 자리를 놓고 수십 명이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수의직 최고의 영예였고, 후배들에게도 선망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상이 서서히 빛을 잃고 있다.
젊은 수의사들의 이직이 늘고, 새로 들어오는 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수의사들의 정체성과 사명감을 키워주던 조직이 차츰 활기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켠이 시리다.
그렇다면 젊은 수의사들이 공직과 산업동물 분야로 눈을 돌리게 만들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경제적‧사회적 보상, 그리고 ‘존중받는 전문직’이라는 확신이 아닐까. 그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공무원 수의사의 자리는 점점 더 공허해질 것이다.
가을 바람이 스치는 날, 오래된 동료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우리는 1년 내내 특별방역기간에 갇혀있다.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걱정이다.” 예전에 같이 근무하였던 동료로서 그리고 선배 수의사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축산신문, CHUKSA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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