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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남성우 박사의 ‘相生畜産’ / 23. 한우사육의 역사와 개량 (1)

우리 민족 신석기 농경생활과 함께 소 사육 추정
삼한시대 소 도살금지…고려시대 과학적 사양관리도

  • 등록 2018.07.26 18:57:46

[축산신문]


(전 농협대학교 총장)


▶ 우리 속담을 보면 소와 관련된 것이 많다. 소가 얼마나 귀했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해 유비무환을 가르쳤을까. 얼마나 우직하고 고집이 세었으면 ‘황소고집’이나 ‘쇠귀에 경 읽기’라고 했을까.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뒤로 물러서지는 않는 행동을 빗대서 ‘황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고 했다. 버릇없이 날뛰는 사람을 점잖게 나무라는 ‘못된 송아지 엉덩이서 뿔난다’는 말은 얼마나 애교스러운가. 이렇듯 우리 생활 속에 스며있는 소의 문화는 바로 한민족과 한우는 하나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 예전에는 소를 기르는 외양간이 사람이 거주하는 집과 같은 지붕 아래 있었다. 외양간의 위치는 부엌 가까운 곳이나 사랑채에 두어 항상 소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배치했다. 추운 지방에서는 부엌과 마주보도록 해 외양간에 온기가 돌게 해서 추위로부터 소를 보호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덕석을 만들어 소 등에 입혀서 추위를 견디도록 했다. 소의 먹이는 여물을 썰어 쌀겨, 보릿겨, 콩깍지 등 농산부산물과 함께 가마솥에 넣고 쇠죽을 끓여서 먹이는 화식(火食)을 했고 가마솥은 사람이 쓰는 것과 같았다. 봄철이나 가을철에 농사일이 많을 때는 쇠죽을 쑬 때 콩을 함께 넣어 원기를 돋우게 했다. 생구(生口)이며 큰 일꾼인 소에 대한 배려였다.


▶ 소를 농사일에 부리기 위해서는 훈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반년이나 넘도록 어미소를 따라다니며 젖을 빨던 송아지가 젖을 떼면 이젠 송아지가 아니라 어미 없이도 살아가야 하는 중소로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이유(離乳)를 할 때 송아지가 어미를 찾는 울음소리와 어미가 새끼를 그리워하는 울음소리는 참으로 애처롭게 교차됐다. 젖을 뗀 송아지는 코를 뚫어 코뚜레를 채우고 고삐를 매어 사람이 부리기 쉽게 했다. 소가 좀 더 자라면 주인과 소통하고 일을 하는 훈련을 시켰다. 길마를 등에 장착하는 훈련, 고삐가 당겨지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훈련, ‘이fi~’하는 구령에 따라 앞으로 나가기, ‘워~’하는 구령에 따라 멈춰서기, 마치 군대에 입대해서 제식훈련을 받는 모양과 흡사했다. 이런 기본 훈련을 받고 나면 Y자 형태로 갈라진 나무를 만들어서 끈을 매어 멍에에 걸고 끄는 연습을 시켰고, 쟁기로 밭을 가는 훈련을 시켰고, 수레를 끄는 훈련도 시켰다. 이렇게 애쓴 끝에 새로운 일꾼 소가 만들어졌다.


▶ 어릴 적 동네에 아주 몸집이 우람하고 잘 생긴 황소가 있었다. 이 황소는 동네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수소라서 암소를 기르는 사람들은 이 소의 씨를 받기를 원했다고 했다. 이미 우수개체 선발, 교배에 의한 가축개량을 실행하고 있었던 거였다. 옆에서 들으니 암소 주인이 수고한 수소에게 먹이라고 콩을 한 말 준다고 했다. 선대 어른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 우리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것은 신석기시대로서 그 당시 농경생활이 시작되었고 이와 함께 소도 사육된 것으로 보인다. B.C. 2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이 출토한 것에 의하면, 한우가 우리나라에서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약 4000여 년 전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한편 B.C. 1000년경의 유적으로 알려진 김해 패총(貝塚)에서 우골(牛骨)이 발굴된 것에 근거하면 약 3000여 년 전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사료(史料)에 고대국가인 부여(夫餘)에서 제천(祭天) 시에 소를 희생물로 바친 기록으로 보면 적어도 2000여 년 전부터 사육되었다고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


▶ 사료(史料)에 나타난 소에 관한 기록을 보면 부여(夫餘)에서는 영고(迎鼓)라고 불리는 제천행사를 지냈으며, 군사(軍事)가 있을 때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발굽의 벌어진 상태를 보아 길흉의 점(占)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군사라 함은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일으킴을 의미한다. 삼한(三韓)시대엔 써레, 철제보습 등의 농기구를 제작해 심경(深耕)농업을 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소를 보호하기 위해서 소 도살금지법을 제정했고, 백제에서는 육부(肉部)를 설치해 가축보호정책을 펼쳤으며, 소를 죽은 사람과 순장(殉葬)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문무왕 때 김유신이 고구려 정복 시 우차(牛車) 2천대로 군수물자를 운송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운반용으로 활용했고, 법흥왕과 성덕여왕 때는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영을 내린 것으로 보아 소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당나라와의 무역품 중에 우황이 있었던 것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 고려왕조 시대에는 의종 때 전목사(典牧司)를 두어 축우요식(畜牛料食) 즉 축우사양방법을 정해서 활용토록 했다. 축우에게 먹이는 사료의 양을 정할 때 계절과 노역(勞役)의 정도에 따라 조정했는데 매우 과학적이었다. 또 전구서(典廐署)를 설치해 소의 증식·보호업무를 담당토록 했으며, 우의방(牛醫方)을 편찬해 축우의 질병 예방 및 치료에 활용했다. 문종 때는 장생서(掌牲署)에서 제물용 소를 관리하도록 했다고 기술되어 있어 소를 제물로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일반 농가는 소 사육 능력이 부족해 나라에서 사육하는 관용축산(官用畜産)에 의존했다. 고려는 신라가 멸망한 원인이 영세농의 빈곤이라 평가하고 중농정책을 시행해 백성들이 농사짓기 편하도록 나라에서 경우(耕牛)를 배부하거니 대여해줌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도모했다. 당시 소는 값이 고가이므로 부호들에 의한 소사육의 집중화 현상이 발생했고, 세농(細農)들은 농사일에 부릴 소가 부족해 관용우나 차용우(借用牛)를 빌려 써야 했다.(1998 한국축산발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