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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좋은 꿀은 좋은 벌에서 시작된다

  • 등록 2026.07.01 10:49:49

[축산신문] 

 

권 형 욱 교수

 (국립인천대학교 생명과학부)
최근 우리 양봉산업은 분명한 전환점에 서 있다. 반복되는 꿀벌 폐사와 이상기후, 응애와 바이러2스성 질병, 밀원 감소, 생산비 상승, 수입 꿀 증가, 소비자 신뢰 약화는 더 이상 일시적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개별 농가의 어려움을 넘어 국내 양봉산업의 지속가능성과 농업 생태계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구조적 과제가 되었다.
겉으로 보면 산업 규모는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 봉군(벌무리) 수는 지난 30여 년간 꾸준히 증가해 2023년에는 250만 군을 넘어섰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의 꿀벌 생육 조사에서는 평균 소실률이 16%에 달했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서는 봉군 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벌꿀 생산량은 오히려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봉군 수 증가는 곧 산업 안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수치로 확인된 셈이다.
이러한 괴리는 양봉산업이 여전히 ‘양적 확대’의 논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봉군 수를 늘리는 방식은 단기적 생산 회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질병과 환경 스트레스가 누적된 현실에서는 오히려 불안정을 증폭시킬 수 있다. 이제 양봉산업은 단순한 규모 경쟁을 넘어 생산성, 질병 관리, 밀원, 유전자원, 품질과 신뢰를 중심으로 한 질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시장 환경 역시 구조적으로 변하고 있다. 국내 벌꿀 시장은 동남아산 저가 꿀과 뉴질랜드산 마누카꿀 같은 고가 프리미엄 꿀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한·베트남 FTA에 따라 2029년부터 베트남산 천연꿀이 무관세로 수입될 예정이어서, 국산 꿀이 가격 경쟁만으로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제 국산 꿀의 경쟁력은 가격이 아니라 품질, 안전성, 생산 이력, 밀원과 지역 특성, 소비자 신뢰에서 나와야 한다.
그 출발점은 ‘벌’이다. 좋은 꿀은 좋은 벌에서 시작된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봉군이 있어야 생산량과 품질이 균일해지고, 그래야만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는 양봉산물이 만들어진다. 포장과 마케팅은 그 다음 문제다. 양봉산업의 고부가가치는 우수한 벌 생산과 관리라는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토종벌은 우리나라 생태와 기후에 적응해 온 중요한 유전자원이다. 그러나 최근 유전체 분석 기술은 토종벌 관리가 더 이상 경험이나 명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국립인천대학교 매개체감염병연구소 연구진의 꿀벌 유전체 분석에 따르면, 일부 토종벌 집단에서는 2017년 전후를 기점으로 외래 동양종 꿀벌과의 유전적 혼합이 뚜렷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특정 농가를 비판하기 위한 지적이 아니라, 토종벌의 유전적 정체성과 장기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학적 진단이다.
토종벌은 단순히 오래된 벌이 아니라 질병 저항성과 환경 적응성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보존해야 할 생물자원이다. 낭충봉아부패병 피해, 외래 계통 도입, 무분별한 이동과 교잡, 체계적인 보존 시스템 부재는 토종벌의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토종벌 보존은 감성적 보호가 아니라 유전체 분석을 기반으로 한 원종 보존, 순계 판별, 핵심 집단 관리, 지역별 유전적 다양성 유지로 접근해야 한다.
서양종 꿀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내 양봉산업의 주력인 서양종 꿀벌은 제한된 집단 안에서 반복 증식과 선발이 이루어져 왔다. 현장 중심의 선발은 장점도 있지만, 질병 저항성이나 월동성, 환경 적응성과 같은 복합 형질을 안정적으로 개선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유전적 다양성 감소와 활력 저하 가능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토종벌과 서양종 꿀벌 모두를 대상으로 한 정밀육종 체계다. 유전체 정보와 현장 표현형 데이터를 결합해 생산성, 질병 저항성, 월동 성공률, 응애 감염 수준, 위생행동 등 핵심 지표를 표준화하고 과학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데이터가 축적되고 연결될 때 비로소 예측 가능한 선발과 지속 가능한 개선이 가능해진다.
과학기반 혁신은 신기술을 무조건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질병 대응 제품과 사료, 각종 기능성 제제는 동일한 과학적 기준에서 효과와 한계를 투명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그래야 검증된 기술은 살아남고, 양봉 현장은 불필요한 비용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국산 꿀의 품질과 진위성 관리도 중요한 과제다. 세계적으로 ‘fake honey’ 문제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잔류농약·동물용의약품·당류 혼입·밀원 진위성에 대한 상시적 검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국산 꿀의 경쟁력은 ‘국내산’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과학적 검사와 투명한 이력 관리에서 나온다. 밀원별·지역별 특성을 객관적으로 관리할 때 국산 꿀의 신뢰와 가치도 함께 높아질 수 있다.
양봉산업의 가치는 꿀 생산에만 있지 않다. 꿀벌은 과수와 채소, 종자 생산을 지탱하는 핵심 화분매개자이며, 양봉산업은 농업 생산성과 생태계 서비스의 기반 산업이다. 양봉을 지키는 일은 특정 업종 지원이 아니라 농업과 식량안보,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다.
이제 선택은 분명하다. 양봉산업은 ‘벌을 많이 기르는 산업’에서 ‘좋은 벌을 과학적으로 기르는 산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유전자와 데이터, 과학적 검증과 정직한 생산이 국산 꿀의 미래 경쟁력이다. 과학기반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며, 그 길만이 한국 양봉산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다.

축산신문, CHUKSA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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