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신문 ]
신뢰는 과학으로 증명된다
최근 우리 사회는 개식용 종식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특정 산업의 퇴장은 단순히 하나의 소비문화가 사라지는데 그치지 않는다. 소비자의 선택은 새로운 시장으로 이동하고, 생산과 유통 구조 역시 변화한다. 최근 흑염소가 새로운 보양식으로 주목받고있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한 단면이다. 예로부터 흑염소는 대표적인 보양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최근에는 건강과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수입 물량 역시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유통시장 규모도 확대되는 추세다. 시장의 성장 자체는 반가운 일이다.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지고 관련 산업이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가 크다.
그러나 시장이 성장할수록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도 늘어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신뢰다.
소비자는 왜 국내산을 선택하는가? 단순히 국산이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생산과정에 대한 믿음, 품질에 대한 기대, 그리고 안전성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원산지 표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형성된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시장 규모가 커질수록 그 약속을 훼손하려는 유혹 또한 커진다는 점이다.
최근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염소고기를 포함한 축산물 원산지특별단속을 실시해 일부 업체의 원산지 표시 위반 행위를 적발했다. 외국산 염소고기를 국내산으로 둔갑시켜 판매한 사례도 확인됐다. 이는 단순한 표시 위반을 넘어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성실하게 생산하는 국내 축산 농가의 노력을 무너뜨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필자는 올해 5월 시험연구소장으로 부임했다. 과거에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업무를 담당하며 국제무역 질서 속에서 원산지의 중요성을 고민했던 적이 있다.
FTA 협상 과정에서 원산지는 관세를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었는지에 따라 수출입 조건이 달라진다. 원산지 규정은 국가 간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기도 하다. 시험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뒤 필자는 또 다른 형태의 원산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국제무역에서의 원산지가 국가 간 신뢰의 문제라면, 국민의 식탁에서 원산지는 소비자 신뢰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염소고기는 원산지 관리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품목으로 여겨져 왔다.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연구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고, 과학적 판별기술 역시 제한적이었다. 현장에서는 서류 확인과 거래기록 추적 등을 통해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오래전부터 원산지 관리의 미래는 결국 과학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서류와 거래기록은 조작될 수 있고, 사람의 기억도 흐려질 수 있다. 그러나 생물과 환경이 남긴 과학적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시험연구소 연구진이 확인한 염소고기 원산지 판별기술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연구진은 국내산과 외국산 시료를 장기간 수집하고 분석했다. 사육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안정동위원소의 특성을 조사하고, 수만 개의 유전자 정보를 활용하는 SNP 분석기술을 접목해 과학적 판별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유전자분석을 이용한 판별기술의 개발기간은 국립축산과학원 가축유전자원센터의 유전정보 공유와 협업을 통해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반복적인 분석과 다변량 데이터 분석을 거쳐 실제 현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의 정확도를 확보했다. 물론 이번 성과의 의미가 단순히 분석 정확도 향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연구소의 역할이 단순히 시험과 분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연구소는 미래의 행정을 준비하는 곳이어야 한다. 아직 현장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더라도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염소고기 원산지 판별기술 개발은 바로 그러한 선제행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개 식용 종식 이후 확대될 보양식 시장을 예측하고, 증가하는 유통량과 원산지 위반 가능성을 미리 살펴 과학적 관리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이후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준비하는 것, 그것이 국가 연구기관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원산지 단속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적발건수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원산지를 속일 수 없다는 인식을 시장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과학적 판별기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 유통을 억제하는 강력한 예방 장치가 된다. 적발보다 예방이 중요하고, 처벌보다 신뢰 형성이 중요하다.
최근 농식품 행정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유전자분석, 동위원소분석 등 첨단기술이 정책과 현장 행정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험과 직관 중심의 행정에서 데이터와 과학적 증거 기반의 행정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원산지 관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국민이 믿고 선택할 수 있는 시장, 정직한 생산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시장, 불공정 행위가 발붙일 수 없는 시장을 만드는 일은 결국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과학적 근거 위에서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시험연구소는 앞으로도 변화하는 소비시장과 유통환경에 대응해 다양한 농식품의 원산지 판별기술과 분석기법을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국민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먹거리 안전과 유통 질서를 지키는 과학의 방파제가 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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