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신문]
최윤재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축산바로알리기연구회장
열심히 일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역설이 지금 우리 축산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료비가 폭등하고, 금리는 오르며, 산지 가격이 떨어지는 어려움 속에 농가들이 계속 빚을 내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농가부채가 축산업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개별 농가의 경영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다. ‘왜’ 빚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가를 묻고, 그 고리를 끊어낼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을 농협이라는 거대 조직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서 찾으려 한다.
누구를 위한 농협인가?
농협은 “농업인 조합원의 권익 증진과 국민경제 균형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농민의 자본으로 설립된 조직이다. 농협 홈페이지에는 농협이 하는 일을 “농업인이 영농활동에 안정적으로 전념할 수 있도록”, “농업 발전과 농가 소득 증대”시키고, “차별화된 농업금융 서비스 제공”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농민에 의해 만들어지고 농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라면, 위기 상황에서 농가를 보호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본연의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농협은 그 역사와 무관하게 수익성만 추구하는 시중은행과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출이다. 어려운 경영 상황 속에서 농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대출뿐이다. 문제는 현행 농업 금융 역시 땅과 건물과 같은 담보만을 보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아무리 사료 효율이 높고 방역 관리를 잘하는 우수 농가라도, 담보로 내놓을 자산이 부족하면 자금을 구하기 어렵다.
현대 금융제도에서 담보를 현재 자산을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정성과 리스크 관리를 중시하는 금융의 속성상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러나 농협은 일반 은행이 아니다. 농민을 위한 조직인 만큼 금융 역시 단순히 담보와 수익성을 따지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농가의 실제 경영 상황과 미래의 소득 창출 가능성을 함께 반영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할 필요가 있다.
자회사들이 수익성 중심으로 재편된 흐름 역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가령 농협사료가 이익을 내는 구조가 과연 바람직한지 물어야 한다. 농협사료의 존재 이유는 ‘장사’가 아니라, 회원 농가에게 양질의 사료를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공급하는 데 있다.
만약 이익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농가에 환원되어야 할 몫이지 조직 내부에 축적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료 사업조차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인식되며, 그 성과가 일부 경영진과 조직 운영에 귀속되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해외 사례가 주는 교훈- 농촌과 미래를 함께하는 농협
해외 사례는 다른 길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일본 농협(JA)은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와 부채 문제를 겪으면서, 단순 대출에서 ‘경영 컨설팅’ 중심으로 금융의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그렇다고 JA가 모든 농가에 무분별하게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JA의 영농지도원은 부채 위기에 처한 농가에 직접 투입되어 경영 방안을 함께 설계하고, 이러한 경영 개선 계획이 수립된 경우에만 추가 자금이나 대환 대출을 실행하는 원칙을 지킨다.
이를 위해 JA는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결합해 판매와 유통까지 함께 담당함으로써 농가의 현금 흐름을 면밀히 파악하고, 담보가 아닌 미래 수익성을 기반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사업성 평가’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프랑스의 크레디 아그리콜(Credit Agricole) 역시 농업 금융의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가령 사료비 급등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농가 소득이 감소할 경우, 원금 상환을 유예하거나 이자를 조정하는 ‘변동성 대응 대출’을 운영하며 농가의 리스크를 함께 부담한다.
더 나아가 금융 수익의 상당 부분을 농업 재해 대응과 기술 혁신에 재투자하고, 탄소 감축 성과가 우수한 농가에 금리 혜택을 제공하는 ‘녹색 금융’ 모델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들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농업 …금융은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기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농가의 위험을 함께 나누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동반자여야 하는 것이다.
농협의 존재 이유는 ‘이익’이 아니라 ‘농민’
농협의 존재 이유는 농민에게서 나온다. 농협과 농가가 상생하는 미래를 위해서는 농협이 단순 ‘금융기관’을 넘어 농민에게 필요한 ‘안전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고민할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담보 대출에서 데이터 대출로의 전환이다. 축산 ICT 데이터를 금융과 연동해, 담보가 부족하더라도 우수 농가에게 저리로 자금을 공급하는 신용평가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패키지형 경영 지원의 도입이다. 돈을 빌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채가 임계점에 도달한 농가에 재무 컨설팅, 경영 개선, 판로 확보 등을 함께 고민하는 통합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셋째, 농협 내부 구조의 개혁이다. 농협중앙회 임원과 자회사 경영진의 보수를 시중은행 수준에 맞추는 일이 우선이 아니다. 협동조합의 취지에 걸맞게 그 재원은 회원 농가의 수익 보장에 쓰일 수 있도록 농협 본연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 개혁의 출발점이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농협법 개정안 역시 이러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현장의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없이 진행되는 제도 변화는 농협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협동조합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특히 감독권 확대나 비효율적 기구 신설 등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농협은 정부의 관리 대상이 아니라 조합원의 필요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번 논의를 단순한 제도 개편을 넘어, 농협의 존재 이유와 협동조합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우리 모두가 다시 질문하고 함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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