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신문]
최윤재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축산바로알리기연구회장
축산업은 필요하지만 축사는 내 주변에 오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날 축산업을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바로 이 모순에 있다. 공익에는 필요하지만 우리 지역에는 안 된다는 지역 이기주의, 이른바 ‘님비(NIMBY)’ 현상이 확산되면서 축산업은 점점 지역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다. 여기에 축사 냄새 민원, 분뇨 처리 문제, 가축 질병에 대한 불안, 환경 오염 우려까지 더해지며 갈등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첨예해진 갈등을 단순한 찬반의 구도로 해결하려는 방식은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과 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축산업이 지역사회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 지금,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는 그 해법을 모색할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갈등이 복잡해질수록 필요한 ‘숙의민주주의’
최근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을 직접 참여시키는 ‘숙의민주주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는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정책 결정을 맡기는 기존 대의민주제(representative democracy)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다.
숙의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이 단순히 찬반 의사를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바탕으로 숙고된 의견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자료를 검토하며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토론을 거쳐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도출된 권고와 합의는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된다.
이 방식의 핵심은 단순한 참여 확대에 있지 않다. 숙의 과정 자체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만들고 갈등의 강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정책에 대한 수용성도 높아진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기후변화 정책, 에너지 전환, 도시 개발과 같은 갈등이 큰 정책 분야에서 시민참여형 숙의 과정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복잡한 사회 문제일수록 정부와 전문가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주민참여가 갈등을 줄인다, 고리 원전 공론화의 교훈
숙의민주주의는 유럽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리 원자력 발전소 사용후핵연료 관리 문제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이다.
고리원자력발전소의 사안은 안전, 환경, 지역경제, 국가 에너지 정책이 복합적으로 얽힌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당시 정부는 일방적인 정책 결정보다는 시민참여단을 구성해 전문가 강의와 자료 학습, 토론을 거쳐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도록 했다. 시민참여단의 숙의 결과는 정책 권고안으로 제시되었다.
물론 고리 사례에도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례가 남긴 의미는 분명하다. 주민들이 정책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질문하며 토론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숙의 과정은 정책 결정의 정당성을 높이고 사회적 신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갈등이 큰 사안일수록 이해관계자를 배제한 채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은 오히려 갈등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리를 비롯해 유럽의 숙의민주주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위험 시설이나 기피 시설로 인식되는 산업일수록 주민과의 신뢰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지속가능한 축산업, 답은 ‘주민 참여’에 있다
축산업을 둘러싼 갈등의 상당수는 정보의 비대칭과 불신에서 시작된다. 주민들은 축산시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충분히 알 기회가 없었고, 반대로 농가와 업계는 주민의 문제 제기를 단순한 민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축산업이 숙의민주주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앞으로 축산업 관련 시설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축산단지 조성이나 분뇨 처리시설, 자원화 시설과 같은 사업의 확대는 현실적으로 피하기 어렵다.
또한 축산업은 단순한 사육 산업이 아니다. 사료 공급, 도축, 가공, 유통 등 다양한 전후방 산업이 연결된 복합 산업이다. 따라서 축산단지나 관련 시설을 계획할 때에도 이러한 구조를 고려해 공간 배치와 운영 방식을 설계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주민과 지역사회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질병 관리와 환경 문제를 고려해 축종별 시설을 분리하고, 도축장이나 가공시설의 위치를 조정하며 이동 동선과 방역 체계를 설계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러한 계획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보다 농가와 전문가, 지역사회가 함께 논의할 때 더 현실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민을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자이자 공동 설계자로 바라보는 접근이 필요하다. 새로운 축산시설이나 자원화 시설을 추진할 때 초기 단계부터 주민이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제도화한다면 갈등을 줄이고 정책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정책에 숙의민주주의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갈등이 크고 이해관계가 복잡한 사안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숙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 될 수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과정 속에서만 축산업의 미래도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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