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에서 쓴 각서

  • 등록 2002.04.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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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발행인

필자는 얼마전 몇몇 축산관계자들과 함께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팜랜드에서 각서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교육(?)까지 받은후 도축라인을 둘러보는 그야말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우리 일행이 관련기관의 초청을 받은 방문단인데다, 도축장방문 역시 초청기관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소위 각서나 교육은 생각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팜랜드 도축장에 도착하자마자 전혀 예상밖의 상황에 직면했다.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은 우리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음에도 기다리게 한후 가슴에 달 방문증과 양면이 빽빽이 인쇄된 A4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며 일행을 안내담당에게 인계하는 것이었다. 수의사인 안전담당관의 안내로 들어간 회의실같은 곳에서 A4용지를 살펴본후에야 그것이 일종의 각서라는걸 알았다.
각서의 내용을 모두 기억할순 없지만 대충 △이곳을 방문하기 10이내에 농장이나 도축장을 방문한 사실이 있는지△가축전염병의 전파경로나 방역에 대한 이해가 있으며 관련교육을 받았는지△이곳을 다녀간후 10일이내에 다른 농장이나 유통시설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지 여부를 묻는 문항이었으며 여기에 예(yes), 아니오(no)로 표시한후 말미에 이름과 연락처를 기재하고 서명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서를 쓰고 난후 시작된 안전담당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손님에게 너무 심한게 아닌가”라는 조금전까지의 생각은 봄눈 녹듯이 사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불쾌감보다는 그들의 철저한 방역의식에 놀랐고, 비록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손님대접을 타박한데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우리 일행의 주소와 서명까지 들어 있는 각서는 유사시 역학조사자료로 활용될것이 뻔하기에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선뜻 응하기 어렵다는게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해당도축장의 정문에서 언짢은 소리가 오가지 않고, 손님대접이 이러냐며 돌아가는 사례가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할수 있을까. 도축장이 정부기관의 주선으로 방문한 손님에게 각서를 요구한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해당도축장은 미운털이 박혀 두고 두고 대가를 치러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귀국후 몇몇 지인들에게 미국에서 각서를 쓰고, 거기다 교육따지 받은후에야 도축라인을 둘러불수 있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이유도 묻기전에 웃기부터 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경험은커녕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조차 듣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수도 있다.
검증할수 없는 각서나 형식적인 교육을 가지고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양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절대 가벼이 볼일이 아니다. 생산농장도 아닌 도축장이 그것도 관련기관이 초청한 외국손님에게 예외를 두지 않고 방역수칙을 적용하는 모습은 방역의식이 몸에 밴 증거라는 점에서 우리에겐 정말이지 절실한 교훈인 것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소위‘높은분’들이 현지점검이랍시고 아무 때나 농장방문에 나서며, 방역을 소독쯤으로 이해하는 축산인도 없다고 할수 없는게 우리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팜랜드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관련산업이 한마디로 물샐틈 없는 방역시스템을 갖추고 몸으로 실천해나가는 그들의 자세를 우리가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 실천했더라면, 그토록 기다리던 돼지고기수출을 눈앞에 두고 발생한 돼지콜레라는 막을수도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운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뉴스관리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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