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축계열화 사업이 그렇게 중요한가?(3)국회의원 지원자금 커 부정내막 의심하기도탈락업체 청와대 인맥동원 선정해달라 주장현재 가축계열화사업은 돼지, 닭, 오리 그리고 한우까지 추진되고 있으며, 지금도 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잘 추진한 사업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에는 그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돼 업체가 정부에서 제시하는 조건을 갖추면 한 업체에 200억~500억원을 2~3년에 걸쳐서 지원하는 정부의 정책사업이 됐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이제는 정부가 그 업체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책방향이 잡혔다.그런데 한번은 그 당시에 국회의 H의원께서 축산국장이 직접 가축계열화사업에 대해 설명을 하라고 하셔서 나는 국장과 함께 보고를 한 일이 있었다. H의원께서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지원하는 자금액수가 너무 컸으므로 특정업체와 연관돼 무슨 부정한 내막이라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을 하셨는지 1년간을 계속해서 관심을 나타 내셨다.그러던 어느 날, 국장이 H의원 비서관의 연락을 받고 의원을 찾아뵈었더니, 가축계열화사업의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이 과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 뵙고 이해시키겠다고 했지만, 국장께서 이
8. 가축계열화사업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2)막대한 자금 소요 가축계열화 추진 ‘산넘어 산’어렵게 결재 통과로 사업 착수…업계 시선집중가축계열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도축·가공·저장시설을 한 장소에 일원화해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규모의 시설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따른 비용은 개소 당 50~1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해 개소 당 25억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물론 도축업계에서는 곱게 볼 리가 없었고 도축장허가는 가축위생과, 가공장과 저장창고 허가는 축산물유통과 그리고 축산농가와 가축계열화사업은 축산경영과에서 관리하는 업무를 분담하고 있었으니 편안하게 계획이 추진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런가하면 누가보아도 농림부에서 업체에 지원한 금액이 그 당시까지 가장 많았던 것은 도정공장에 업체당 5억원을 지원하는 사업이었으니 1987년에 계열화업체에 2억5천만원씩을 지원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에는 가축계열화사업을 왜? 반드시 추진해야 하는지 등에 문제에 부딪치게 됐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기에 안건을 작성하고 축산국장에게 결재를 올렸더니, 대담하고 도전적인 업무추진
8. 가축계열화사업이 그렇게 중요한 사업인가?(1)개방화 대응위해 축산업 조직화 시급 판단불필요한 도축단계 부작용…계열화사업 추진가축계열화사업이란 품질이 우수한 일정 크기의 가축을 기르는 것을 축산농가가 전담하고 축산농가가 생산한 가축을 경영을 전문으로 하는 계열주체가 계약생산에 의해 수집, 도축·가공·저장 및 유통·판매까지 전담토록 하는 사업이다. 즉 가축의 사육은 축산농가가 하고, 축산식품의 가공·처리, 품질 및 유통은 가축계열주체가 담당해 사육과 유통·판매 등을 분담하도록 하는 체계로서 축산업협동조합과 같이 축산 조직의 현대화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는 첫 번째 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축계열화사업은 이미 1982년에 우리나라 축산업의 근대화를 위해 필요성이 인정돼 내가 참여해 수립한 축산진흥과 산지개발 10개년계획에 포함돼 발표가 됐으며, 1984년에는 축산법을 개정해 정부가 법규정까지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4년 하반기에 발생한 소 값 파동으로 몇 년간은 새로운 정책의 선택과 추진에 어려움이 많아 어물어물 하다가 1986년의 UR협상이 시작되는 시기를 맞이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소 값 파동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그러
7. 시험연구체제의 개선인가? 개혁인가?(7)연구원들 실패 두려워 설계심의 조사항목 제외 “모든책임 내가 진다” 과감한 연구주문 큰성과 내가 역점을 두고 추진한 시험연구체제의 전환 및 시험연구절차의 개선은 보수적인 사고와 내가 최고라는 두뇌를 보유한 조직에서 볼 때 매우 못 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연구원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웃음 또한 사라지고 있는 이때의 일이다. 1993년 9월 28일로 기억이 나는데 그 날은 강당에서 대학교수, 타 연구기관 연구원, 산업계 기술자 및 행정공무원과 축산시험장 연구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우의 시험연구 프로젝트화를 위한 시험연구방향에 대해 담당과장이 발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요새 별난 짓들을 하고 있다며 한우 개량연구는 다했는데 무슨 새롭게 한우개량연구를 하겠다고 떠드느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다보니 전임 장장께서 서 계셨다. 나는 “한우개량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 있으면 말씀을 해 보십시오. 한우개량 목표를 산출 근거도 없이 600kg로 정해 놓은 것 외에는 무엇이 있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말했더니 전임 장장께서는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다며 미안
연구원 발표회 통해 신기술 현장홍보 유도축산연 시험연구 설계심의 체계도 합리화7. 시험연구체제의 개선인가? 개혁인가?(6)시험연구과제의 프로젝트화를 실현하기위해 앞에서 실시한 몇 가지의 일을 추진하면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연구원들을 누가? 왜? 이렇게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생각이 공직에서 마지막 기회를 잘 마무리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출근시간이요, 별을 보며 집으로 가는 것이 퇴근시간이었으며, 농림부에서 근무할 때에는 담배를 하루에 2갑을 피웠으나 축산시험장에 와서는 하루에 4갑을 피운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시간을 빼고는 입에서 항상 담배연기를 뿜으며 지내기에 이르렀다. 시험연구과제의 프로젝트화는 우수한 연구원의 양성, 시험연구 분위기 조성, 시험연구 기기와 실험실 확보, 연구과제의 설계심의 및 보고체계 개선, 충분한 예산확보, 그리고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무질서한 간섭을 막아주는 바람막이 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연구원은 연구를 해 보고서를 작성하면 되는 것이고 그 연구결과를 이용하는 축산농가, 농림부 및 학계에서는 연구보고서를 보고 활용을 해야 한다는 연구원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정책건의
7. 시험연구체제의 개선인가? 개혁인가?(5)세 번째로 내가 축산시험장의 변화를 시도한 것은 시험연구과제의 프로젝트화를 위한 넉넉한 예산 확보와 실험기기 및 연구시설의 신설이었다. 앞에서 추진한 일중에 사람을 기르는 일과 시험연구 분위기를 활성화하는 일이 잘되고 있어도 연구비와 연구실 및 실험기기가 준비가 되지 않으면 산업계와 정부정책으로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돼 예산과 연구시설도 우선과제로 동시에 추진을 했다.이 과정에서 내가 새로운 기관운영체제를 도입한 것은 각 과장으로 하여금 예산, 국제관계, 기관과 연구원 홍보, 연구기획 등으로 분담함으로서 각 과장이 기관운영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또한 과의 연구내용이 기능별로 규정돼 있어 기능별로 시험연구를 추진하다 보면 공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가축별 연구팀을 구성해 3개월마다 토론회를 갖게 하고 각 과장이 가축별로 관리책임자가 되도록 했다. 이 토론을 할 때에 설계의 잘못, 실험 추진의 허점, 조사항목의 추가할 내용 등의 상황이 발견되면 즉시 설계변경 또는 설계 내용에 추가해 시험연구를 실시하였고 이로써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축산시험장 연구원 전원을 기관장 재임기간 도안 모두 해외 출장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실행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나 자신을 돌볼 틈은 없었다. 본청에서는 내가 농촌진흥청에서 행정을 하다가 연구기관장으로 부임을 했으니 외국의 연구기관을 돌아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여러 차례의 권유를 받았지만 그럴 때마다 해외 출장을 위한 예산이 부족하다고 어필을 했다. 그래서 여비를 지급받아 출장을 다녀오라면 그 출장비도 연구원들을 해외에 출장을 보내는데 사용했으니 본청으로부터 지적을 받아야만 했다. 때론 축산시험장의 예산에 해외여비가 부족해 충분히 확보돼 있는 국내 여비를 일부 사용해 충당하기도 했다.그런데 국내 여비항목에서 해외 출장비를 지출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청에서 지적을 하기에 나는 경제기획원에 질의를 했더니 다행히 불법이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고, 1995년 예산부터는 국내와 해외여비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예산체제가 변경되기까지 했다.그런데 또 하나의 기적이 발생한 것은 마지막 남은 한명의 연구원을 해외출장 보내고 3~4일 지난 어느 날 미국사료곡물협회 박영인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 회장은 이 장장이 연구원들을 모두 해외연수를 보낸 후에야 외국
7. 시험연구체제의 개선인가? 개혁인가?(3)두 번째로 내가 시도한 일은 연구원의 역량 강화를 우선과제로 선택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이 연수교육 시스템의 활성화였다. 나는 직원조회에서 여러분들 106명을 모두가 외국 연구기관을 돌아보고 올 때까지 나는 해외출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약 하면서 외국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우선해 연수과정을 마련해 주고 어학시험에 합격하면 근무평점에 반영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축산시험장의 1993년도 예산에는 장장이 외국을 돌아볼 출장비가 15백만원이 있었으며, 연구원의 해외출장비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적은 금액이 책정돼 있었다. 또한 전 직원이 국내 출장비로 사용할 수 있는 국내 여비도 25백만원이 고작이어서 장장, 과장, 학회에서 발표하는 연구원만이 출장을 다닐 수 있었다. 절반의 연구원은 국내 출장도 1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면서 좋은 연구내용을 내 놓으라는 독촉만을 받았던 것이다.그래서 나는 연구원들의 국내 출장을 자유화한다고 발표를 하니 우선 과장들이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25백만원의 예산으로는 장장, 과장,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할 사람만 출장을 다녀도 10월부터는 여비가 없어 출장을 갈수가
브랜드사업 연계 안전축산물 생산·판매 가교역할생축장 활성화 ‘청풍명월 한우’ 생산기지로 활용조합의 건전경영을 위해 임직원과 조합원들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내실경영을 실천해 나가고 있는 괴산증평축협(조합장 정헌)이 2006년도 농협중앙회 종합업적평가에서 전국 축협 우수조합으로, 또 충북도내 축협 중 최우수조합으로 선정되면서 조합 설립 이래 가장 빛나는 업적을 달성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괴산증평축협은 이번 성과는 정헌 조합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지역축산업 발전을 견인하고 양축농가 실익을 제고시킨다는 사명감을 갖고 알차게 사업을 전개한 가운데 조합원들의 주인의식에 바탕한 적극적인 사업 전이용의 결과라고 소개했다.괴산증평축협은 조합원 1천6백97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본소와 증평지점, 연풍지소를 운영하고 있다. 괴산증평축협의 2006년도 사업의 특징은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이 균형 있는 성장이다. 지난해 금리 인상 등 다변화되고 있는 금융환경 속에서도 조합의 신속한 경영대응으로 예수금이 전년대비 33억이 증가된 555억원의 실적을 나타냈다. 상호대출금도 68억이 증가된 420억원을 달성하면서 예대비율 74.3%의 실적을 보였다. 괴산증평축협은 특히 이런 사업 성과를
< b>연구원평가제 첫 가동…인사 공정성 강화< b/> < b>때론 바람막이 역할로 축산시험장 ‘생기’< b/>축산시험장의 업무보고를 받아보니 연구원들의 사기(士氣)는 절망적이요, 열정은 찾아 볼 수가 없으니 모험과 도전정신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실태를 파악한 나는 시험연구과제의 프로젝트화를 전제로 해 시험연구체제를 완전히 체질개선 하고자 실행에 돌입했다.첫 번째가 인사의 공정성을 기하고자 연구원의 평가제를 실시하기로 하고 연구논문의 학회지 발표, 연구결과의 정책건의, 특허출원 및 학위취득사항 등을 모두 점수화해 연구관 승진대상자 선정과 과장 승진대상자 선정 등에 활용했다. 실제 과장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성과의 순위를 정한대로 2~3회에 걸쳐 인사를 실행했다. 그 후 연구원들이 나의 집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그해 4월부터 집으로 방문하는 사람은 기억하고 있겠다고 공표를 하니 삭막하기는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모든 잡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현재의 공무원 평가제도는 1993년에 축산시험장에서 처음 실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농림부, 농촌진흥청, 학계 등에서 시험연구과제의 선택요구와 실제공동연구
내가 1993년 1월 1일자로 축산시험장장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축산시험장은 농가와 업계 및 농촌진흥청으로부터도 소외를 당하고 있을 때였으며, 연구원들 자신도 의욕을 상실해 자신감을 잃고 있는 때였다. 농림부에서 15년간의 행정을 하다 연구기관의 장으로 발령이 나는 것이 처음 있는 일로써 축산시험장 직원은 물론이고 농촌진흥청에서도 큰일이 났다고 뒷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들을 알고 부임을 하게 됐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는데 무었을 더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푸념들을 하는 분위기인 것도 알고 있었다.그 당시에 농림부와 축산업계에서는 UR(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완료되면 축산식품의 개방이 불가피해 국제경쟁력 확보와 고품질 축산식품의 공급 등 대응책 마련을 위해 새로운 기술이 현장과 정책에 반영돼야했으나 좋은 결과가 없으니 불만과 불신이 팽배하고 있었다. 이 때 축산업계와 농림부에서는 “우리는 할일을 다했는데 무엇을 더 하라는 말이냐”고 하는 말이 성행했으니 이 자조적(自嘲的)이고 패배의식(敗北意識)에 빠져 있는 조직을 활성화해야 하는 책임이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또한 ‘이인형이 너는 별수 있느냐, 한번 해
한우 고급육생산과제 퇴임 후 중단육용품종개량연구 결실 맺길 희망한우 개량목표를 1990년까지 정하지 못하게 된 것은 모든 개량업무가 각 가축별 개량협의회에서 합의를 통해 결정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우개량협의회 위원간에 너무나 상반된 의견대립이 돼 있어 도저히 결정하기가 불가능 했다. 과장이 그 문제를 상정하였다가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다는 엄포 아닌 엄포를 담당계장이 놓을 만큼 의견대립이 심해 몇 년째 상정을 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가축육종분야는 깊은 지식이 없어 설동섭 회장의 도움을 받았었으며 그 당시 격론을 예상해 한우 개량목표를 농림부의 검토사항으로 개량협의회에 상정을 했다. 그 후 제도적으로 정부에서 가축개량목표를 설정해 추진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규정이 1993년에서야 축산법에 신설됐다.그런데 내가 축산경영과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1990년 7월 1일자로 육우와 육우교잡우는 제주도와 강화도에서만 사육할 수 있도록 장관의 결재를 받아 행정조치를 취했는데 1993년 1월에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장으로 발령을 받고 업무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공직을 수행하면서 잘못한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