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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가 걸은 60 성상(星霜)의 목장길

안양종축장서 첫발…61년간 축산위한 행보 주마등

  • 등록 2015.08.21 10:28:08

 

김강식 고문((사)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

 

일본 통치하에 있던 시절, 나는 1932년 2월 전라남도 장성군 가난한 소농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 세계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가장 악랄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히로시마와 8월 12일 일본 나가사키에 터트린 미국의 두 발의 원자폭탄을 맞고 일본천왕은 8월 15일 정오 12시 미국을 비롯한 연방국에 떨리는 처참한 음성으로 무조건 항복한다는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려왔다. 라디오를 듣고 어느새 남녀노소 할것없이 집을 뛰쳐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던 70년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8월 15일은 나에게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이후의 학교사정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여 한마을 친구들과 같이 8월 20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갔다. 도착하니 이미 일본인 교장선생님은 줄행랑을 친 후였고, 조선인 선생 4~5분이 교무실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9월 이후 우리는 준비도 되지않은채 조선인 선생으로부터 한글로된 교제도 없이 우리말로 말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 이듬해 1월.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일본인 중학교(5년제)의 학생 전원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동중학교에서는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1945년 3월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서류를 작성하여, 입학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정입학과 다름없었다.
1951년 중학교 6학년 과정 중에 6월 25일 북침에 의한 한국전쟁이 발생하였다. 9.28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등의 한국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 축산과의 첫 인연의 시작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여 복무기한을 짧게 마치고 1956년 10월 제대, 앞으로의 진로결정을 위한 생각에 착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보수적인 부모님께서는 따로 얘기를 해두었으니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농업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다 자리가 생기면 광주농업학교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내 스스로가 교사직은 내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진로상담을 위해 나의 모교인 서울대 농대를 찾았고, 축산학과 은사이신 윤상원 과장님(서울대농대학장 및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 역임)을 만나 상의했다.
윤상원 과장님은 성환에 있는 국립축산기술원 또는 경기도 안양종축장 2곳을 추천하셨고, 원하는 곳을 택하면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하셨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잘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린 후, 축산학과 동기생 중 농대 대학원 석사과정이면서 경기도 안양종축장의 촉탁으로 근무하는 한석현 동문(건대 축산과 교수 역임)을 찾아갔다.
한석현 동문은 국립축산기술원(충남 성환소재)보다 안양종축장이 서울에서도 가깝고, 가축 사육두수도 많고, 여러 가축사육에 대한 경험을 이수하기에 적합하니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받아, 나는 안양종축장으로 내 일터를 결정하였다.
그 해 9월 초 윤상원 교수님의 추천서를 받아 경기도 안양종축장 노용환 종축장장님을 찾아 뵙고 인사드렸다. 이력서 및 추천서 검토 후 연락을 주겠다라고 하셨지만 두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어,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석현 동문에게 왜 연락이 없는지 물었다.
동문은 “아직 장장님이 채용확정을 못하고 계신다. 너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편견으로 채용에 심사숙고 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널 믿고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렸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라고 하는 편지였다.
결국 3개월이 지난 12월 1일부터 안양종축장에 정식으로 출근하여, 비록 정규직이 아닌 촉탁의 자리지만 나의 60년 목장길의 첫발을 내딛은 나로서는 그리 자리가 중요하지 않았다.
경기도 안양종축장을 시작으로 종축장(2년), 농촌진흥청 시험국(10년), 일본 농림성 축산시험장 기술연수(2년),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 영양생리과장(4년), 농촌진흥청 연구조정과(3년), 농림수산식품부 축산국장(4년),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장(10년), 농촌진흥청 차장(5년), 공직 퇴직 후 (사)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 회장(12년) 및 고문(6년).
2015년 5월 현재까지 만 61년간을 우리나라 농업과 축산발전을 위하여 묵묵히 걸어왔고, 그동안의 잘한일과 잘못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세월이었다.
내가 걸어온 과거를 회고하고, 우리 축산발전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는 축산관련 관계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걸은 60 성상의 목장길을 축산신문에 연재하게 만들어 주신 윤봉중 회장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60 성상의 목장길의 회고록이 앞으로 우리나라 축산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보람하나로 남은 여생을 기꺼이 보내고자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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