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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9년간 눈부신 발전…식량산업 기틀 강화에 일익

유가공산업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축산신문 조용환 기자]

 
국내 유가공 역사

국내 첫 낙농가는 1910년 서울 봉래동에서 삼태(三台)목장을 경영한 성봉선(成鳳宣)씨라는 기록이 있고, 유가공 역사는 1934년 조직된 청량리농유조합이다. 1세기 낙농역사를 바탕으로 한 유가공산업도 79년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본지는 유가공산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제시해보았다. 

 

서울우유조합 전신 ‘경성우유동업조합’태동으로 진일보
 50년대 말 유축농업 전환 계기 원유 증산 ‘탄력’
   ’62년 서울우유 창립 이어 지역별 우유조합 건립
   ’72년 집유시설·유가공공장 낙농권역별 거점화 
 ’93년 원유량 185만9천톤서 20년새 211만톤으로
 시유소비 감소세…치즈·발효유 등 수요는 증가


조선총독부 농림국에서 1943년 발간한 조선축산통계자료에 의하면 낙농가수·유용우 두수와 연간 착유량은 1920년 72명·692두·69만6천320kg에서 1942년 184명·1천955두·391만4천483kg으로 늘었다.
국내 첫 우유공장이자 낙농단체는 1934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전농리(현 동대문구 전농동)근처 낙농가 10명이 조직한 청량리농유조합이다. 1937년 설립된 경성우유동업조합과 밀접한 이 조합은 주로 보존기간이 긴 연유를 생산했다.
美미네소타대학에서 동양인 최초로 석사학위를 받고, 당시 조선총독부 농림국에 근무했던 故윤상원씨(서울농대학장·건국대 축산대학장 역임)는 1986년 3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경성우유동업조합 우유처리장을 경영하던 일본인이 철수하여 그 공백이 컸다. 미군정 2년과 임시정부 1년간 정치·사회·경제 불안에 밀도살도 성행하여 해방 전 3천600kg이었던 경성부(현 서울시) 하루 우유소비량은 540kg으로 줄었다”고 밝힌바 있다.
농림부 축산국장을 두 차례 역임한 故황영구씨는 “결손누적으로 힘들었던 조합은 1949년 정부수립과 동시 내실을 다져 그 해에 외채와 조합원에게 밀린 유대도 청산했다. 조합은 정동에 우유선전실(현 밀크홀)을 만들고, 남대문·서울역에 특약점을 개설해 우유판로를 모색했다. 싹을 틔우던 낙농기반은 1950년 6.25전쟁으로 붕괴됐다. 다행히 농업시험장 성환지장(현 축산과학원 축산자원개발부)에서 보유했던 젖소 50여두는 도보로 경주까지 피난했다가 수복 후 복귀돼 오늘날 젖소증식기반이 됐다”고 술회한바 있다.
조합은 1954년 1월 전란 후 첫 총회를 열고, 부족한 원유확보를 위해 유대를 두 차례 인상했다. 이듬해도 인상하여 1955년 8월 유대는 kg당 127환92전·조합수수료 50환63전·특약점 수수료 34환65전으로 조사됐다.
가정배달이 주였던 우유는 1956년 태극당제과점에 하루 200개씩 공급됐다. 또 오리온제과가 국내 최초로 우유 캐러멜을 생산하고, 해태와 크라운제과도 밀크캐러멜 생산에 나서 우유는 더욱 부족했다.
조합이 1958년 2월13일 각 목장에 발송한 ‘원유증산 급고의 건’ 제하의 공문을 보면 “우유를 더 생산하라! 다른데 쓰지 말고 한 방울이라도 더 보내 달라”는 절규의 글귀가 있다. 조합원은 보답했다. 1959년 처리된 원유는 47만6천160kg(하루 평균 1천300kg)이며, 원유 불 합격률은 2%로 낮아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2차 축산부흥 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사료자원의 개발과 사양기술 향상, 방역위생 등과 함께 주곡농업에서 유축농업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울러 축산물처리시설을 완비하여 국민식생활 개선과 수급에 안정을 기하고, 해외로 축산물을 수출하는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 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농림수산부에 근무하고, 수의축산국장을 차례로 역임한 故김영한씨(한국야쿠르트고문 역임)·故이남신씨(대한수의사회장 역임)·故유윤수씨(서울우유조합장 역임)는 증언했다.
젖소종부에 한우도 이용됐던 국내 낙농업은 1957년 능력이 우수한 젖소종모우를 서울우유 지도상무를 지낸 이정호씨의 부친(故이한순)이 운영한 순흥목장 등에 보급됐다. 노량진의 사설목장(김범)은 젖소종모우를 23만환에 구입하여 1회 종부당 1천500환의 수수료를 받았다 한다. 1963년 가축인공수정소(농협 젖소개량사업소 전신) 故김선환씨를 주축으로 한 인공수정 보급이 활기를 띠면서 개량이 시작됐다.
1962년 1월 23일은 서울우유 창립총회 일이며, 농협중앙회 회원조합으로 가입한 날이다. 이듬해 11월 9일은 부산경남우유조합이, 12월 7일은 대구경북낙농조합이 설립됐다. 1966년 5월 23일은 대전충남우유조합이 설립되어 우유판매와 낙농발전에 견인역할을 했다.
1968년 5월 10일 故박정희 대통령은 수원 농진청에서 열린 권농일 행사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쌀과 보리농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국토의 65%인 산지를 개간이 가능한 곳부터 초지를 만들고, 축산을 진흥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축산행정담당자 였던 송찬원씨(농수산부 축산국장·축협중앙회장 역임)는 “故박정희 대통령 지시대로 9월7일을 ‘목초의 날’로 제정하고, 목야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면서“박근혜 대통령도 성환 축산자원개발부와 함께 낙농트라이앵글인 한독목장·한뉴목장 등 선친이 이룬 업적을 받들어 앞으로 한국축산업을 보다 진흥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72년 착유우는 1만618두, 우유생산량은 2만8천668톤으로 이를 처리키 위한 집유시설과 유가공공장을 낙농지대별로 서울·대전·전남·경남지역에 설치했다. 현재 서울우유는 남양·매일·빙그레·건국·동원·연세·야쿠르트 등과 미래 유가공산업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낙농진흥회 자료에 의하면 1993년 185만8천929톤이었던 전국의 원유생산량은 2000년 225만3천635톤으로 증가했으나 2006년 213만9천835톤으로 감소했다. 2010년 겨울 FMD로 인해 2011년에는 188만9천732톤에 그쳤지만 농가의 노력으로 2012년 211만697톤으로 회복됐다.
시유생산은 1993년 142만1천990톤에서 2008년 170만2천295톤으로 늘었으나 2012년에는 168만5천292톤으로 감소했다. 이처럼 시유소비는 감소한 반면 치즈와 발효유 등 고급유제품은 증가추세다. 1993년 1만2천157톤인 치즈생산량은 2012년 2만2천522톤으로, 발효유도 1993년 46만5천62톤에서 2012년 56만7천639톤으로 각각 늘었다.
주요 업체에서 2011년 올린 매출액은 표와 같이 약 4조5천645억원이다. 매출액은 서울우유·남양유업·야쿠르트·매일유업 순이며, 당기 순이익은 야쿠르트·남양·서울·매일 순으로 집계됐다. 그 차액도 큰 변화를 보인다.
서울우유는 지난해 적체된 재고분유를 제조원가보다 60% 이상 낮은 kg당 4천원대에 1천300톤을 판매했다. 그 가운데 72% 이상을 경쟁업체인 한국야쿠르트에 판매했다. 관계자들은 경쟁업체끼리 선의의 경쟁은 권장돼야겠지만 무조건식 소진은 방책은 커녕 낙농과 유가공산업의 안정적인 발전을 저해시킬 우려가 다분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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