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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정영채 박사의 학문과 인생에 대한 회고 / 5. 내가 걸어온 교육환경의 변화(1)

집합교육 형태서 공교육으로 학교 변화 발전

  • 등록 2007.10.13 10:57:02
대학 총학점 만으로 졸업…전공지식 빈약케 해

나는 여기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구대학의 선진 교육제도나 사상과 학풍, 또는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의 외부 영향, 근대화된 대학의 교육과 연구 환경의 변화 등에 대해서는 교육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논할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내가 걸어온 교육환경의 변화와 경험 한 바를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술회 하고자 한다.
서당과 초등학교 : 해방 전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교육이라고 한다면 독학에 의한 독자적인 지식의 습득과 진리탐구의 형태였던 것이 집합교육 형태인 서당(書堂)에서의 한글과 한자(漢字)의 문자(文字)해득과, 유교 문화에 바탕을 둔 윤리, 도덕을 중심으로 한 가족중심, 지역사회중심에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교육을 거쳐, 국가적 공교육 기관인 학교로 집단화되는 교육환경으로 변화 발전했다고 생각된다.
또 해방 전 제국주의시대의 우민정책(愚民政策)으로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했던 국민들에게 해방 후 성인들의 한글(당시는 언문(諺文))을 깨우치기 위한 마을단위 성인교육(야학 등)형태도 있었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또 사물과 환경을 접하는데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생활환경의 제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자와 한문을 터득해서 벽에 걸린 한줄기 글귀를 읽고 풀이를 할 줄 알아야 유식하단 말을 듣고 양반행세를 했었다. 그러나 한글을 터득해봐야 천민을 면하기가 어렵다고 했던 때도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3학년 때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당에서 한자를 배웠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재학 중에도 틈틈이 한문(漢文)을 읽었었다. 이 때 읽었던 글귀가 오늘의 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대학 강단에 서는 동안 학생들에게 한자와 한문을 많이 익히고 읽을 것을 권유했었다. 한자를 모르면 무식하단 말을 듣는다고 꾸짖기도 했다. 요즈음 대학생들을 보면 부모님의 함자는 고사하고 자기의 이름조차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하기야 세월이 지나면 전 세계가 영어라는 단일언어 생활권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인류사를 알아야 할 책이 윤석봉 교수님에 의해 출판된 것이 인쇄된 교재로서는 처음이었다. 그 무렵 이장락 교수님께서 번역서로 발간한 약리학책은 사전같이 귀한 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강의만은 토요일까지 매일 8시간씩 꼬박꼬박 진행됐다. 180 졸업학점에 198학점을 따고 졸업을 했다.
대학원 그리고 조교에서 교수까지 : 1961년 3월 석사학위를 받고 바로 해부학교실에 조교로 임명되었고, 조교로 있는 동안 수의과대학이 농과대학 수의학과로 전락해 서울 연건동에서 수원캠퍼스로 이전을 했다. 대학원 재학 중에 군사혁명이 났고, 1967년 2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3년 3월부터 1970년 2월까지 충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로 재직했었다. 1970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중앙대학교 산업과학대학 동물자원과학과(당시는 농과대학 축산학과)의 부교수, 교수로 재직했고, 2002년 2월말로 정년을 맞아 3월부터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중국연변대학 명예교수(1996. 5) 중국심양농업대학 명예교수(2002. 9)로 임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에는 대학원 석사과정도 주로 강의중심이었으며 실습은 견학이 대부분이고 이때의 교재는 철판에 긁어서 프린트 하는 것 보다 조금 발전한 공타라고 하는 방법으로 한자 한자 찍어서 만든 교재도 있었으나 판서가 대부분이었다. 학위 논문도 기초적인 실험이나, 설문지에 의한 조사연구논문이 대부분이었으며, 논문은 각자가 프린트물로 제출했었다. 1961년 조교로서 시간강사 발령을 받아 처음 강의를 맡았던 나 역시 대부분의 강의가 내가 작성한 원고를 타자나 공타로 찍어서 만든 것을 썼으며, 주로 강의안에 의존한 강의였다. 저서는 1975년 처음으로 최신식품위생학을 비롯해서 그 후 가축해부생리위생학(’76), 최신가축위생학(’77), 동물미생물학(’77), 축산학(’77), 가축번식한실험(’79), 수의공중보건학(’82), 신고가축번식학(’83) 등 23권의 교재를 출판하면서 교재로 쓰기도 했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강의만은 생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으며 나의 적성에 적합한 직업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태어나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물어오면 나는 물론 “대학교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대학교육과 졸업학점 : 1960년대까지 대학의 강의는 주입식 중심이었고 졸업학점은 180학점이었다. 이것이 160학점으로, 1970년대는 실험대학이란 명목으로 140학점으로 축소되었고 현재는 132학점으로 축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공은 대학원에 가서 하던가 선택으로 하라는 명분하에 전공과목 축소, 교양과목의 상대적 확대, 선택과목의 신설, 자율선택학점의 확대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졸업 총 학점만을 졸업학점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전공과목을 이수할 기회가 줄어들거나 어려운 전공과목의 기피현상이 발생하다 보니 전공분야의 지식이 박약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자율선택 학점만으로도 총학점만 채우면 졸업이 되기 때문에 축산학과 학생이 대단위 교양 강좌에 가서 적당히 학점을 취득하는가 하면, 음악 감상, 여성학, 가족관계학 등으로 학점만을 채우는 웃지 못 할 현상이 나타났고, 전공을 알 수 없는 학사증만을 받아 쥔 쓸모없는 고학력자만 양상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대학 4년을 마친 학사라고 다 같은 학사가 아니라 인간이나 지식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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