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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인형의 ‘황소 발자욱’<46회>

제3부 내 인생에 승부를 걸었던 사건들(25)

  • 등록 2007.02.26 11:44:52
7. 시험연구체제의 개선인가? 개혁인가?(3)

두 번째로 내가 시도한 일은 연구원의 역량 강화를 우선과제로 선택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이 연수교육 시스템의 활성화였다. 나는 직원조회에서 여러분들 106명을 모두가 외국 연구기관을 돌아보고 올 때까지 나는 해외출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약 하면서 외국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우선해 연수과정을 마련해 주고 어학시험에 합격하면 근무평점에 반영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축산시험장의 1993년도 예산에는 장장이 외국을 돌아볼 출장비가 15백만원이 있었으며, 연구원의 해외출장비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적은 금액이 책정돼 있었다. 또한 전 직원이 국내 출장비로 사용할 수 있는 국내 여비도 25백만원이 고작이어서 장장, 과장, 학회에서 발표하는 연구원만이 출장을 다닐 수 있었다. 절반의 연구원은 국내 출장도 1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면서 좋은 연구내용을 내 놓으라는 독촉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연구원들의 국내 출장을 자유화한다고 발표를 하니 우선 과장들이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25백만원의 예산으로는 장장, 과장,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할 사람만 출장을 다녀도 10월부터는 여비가 없어 출장을 갈수가 없는데 어떻게 대처한다는 것이냐면서 걱정이 태산인 것 같았다. 나는 연구원들이 사용할 여비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농림부와 산업계의 협조를 얻어 시험연구용역비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출장비를 많이 책정하는 방법을 계획했다. 부임 첫해인 1993년에 이를 첫 실행해 일정부분 해결을 할 수 있었다. 또한 1994년부터는 정부예산에 충분한 금액을 확보하게 됐으며 1995년부터는 부임 당시 년 출장비 예산인 25백만원의 10배인 2억5천만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로써 연구원들의 출장을 자유화한다는 당초 약속을 예산에 반영된 여비만으로도 실현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출장자유화를 하면서 부작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2일 이상 출장을 다녀 올 때에는 출장복명서를 제출하도록 했으며 장장과 과장 그리고 연구원이 강사료를 받는 출장과 대학에 강의를 갈 때에는 출장비를 청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써 꿈과 같은 출장자유화가 실시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들이 출장일수와 출장을 가야할 현장 및 업체를 사전에 선정하고 계획을 세워 다니는 체계적인 출장체제가 확립 되었다. 이로 인해 연구 분위기 또한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면서 연구원의 전원 해외출장을 위해 전공과 출장 내용에 따라 사람을 선정해 실행에 옮겼다. 3년차인 1995년에는 일본의 연구실태를 돌아보는 목적으로 10명을 선발하면서 영어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는 별도의 연구원 2명에게는 영어시험 통과 땐 자기에게 필요한 전공분야를 선택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선발인원에서 제외를 시켰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몇 달이 지난 그 다음해 초에 영어시험에 모두 합격해 약속대로 장기 해외연수를 할 수 있는 건을 만들어 달라고 나를 압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한사람은 다행히 봄에 해외출장을 보낼 수가 있었지만 다른 한사람은 여자연구원이었으며 그 사람에게 맞는 연수계획을 만들지를 못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해 여름에 태국에 6개월 과정의 해외출장을 만들 수가 있어서 1996년 12월초에 마지막 한 사람도 약속한대로 해외연수를 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총 105명의 해외연수를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약속을 공직 마지막 해에 실현을 하니 누구도 믿지 않았을 일을 해 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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