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와 육우교잡사업은 축산법이 제정되기 1년 전인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정부의 검토과정을 거쳐 1966년 1월에 육용종인 애버딘 앵거스 품종 52두와 싼타 거투루디스 품종 5두 총 합계 57두의 종모우(種牡牛)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애버딘 앵거스는 영호남을 중심으로 남부 지역 21개 지역을 소 교잡종 생산단지로 지정하고 배정했으며, 싼타 거투루디스종은 제주시험장에서 교잡시험용으로 이용했으나 모두 실패를 하게 됐다. 이 사업이 결정되기까지는 4년간의 논의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대형종인 육우 샤로레 수소에 한우 암소를 교잡해 잡종강세를 이용한 쇠고기 증산을 위해 1969년에 또 다시 샤로레 종모우 5두를 미국에서 수입해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에서 교잡시험용으로 이용한 것이 경기도 강화도에서 실시한 교잡우 생산사업이었다. 강화도에서 생산된 교잡종으로서 샤로레 합성종 대형종모우를 선발한다는 목적으로 혈액비율이 샤로레 62.5%, 한우 37.5%인 개체 200~250여두를 공시축(供試畜)으로 해 축산시험장에서 교잡에 의한 대형한우 종모우선발이라는 사업을 1991년부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육용우를 수입해 교잡종을 증식하는 사업이 실패를 했으나 1978년부터는 쇠고기 증산과 농가소득 증대를 기한다는 명분으로 육우 암소를 수입하게 됐다. 육우 수입두수는 1978년에 1만두, 1979년에 5천두, 제3차 석유파동으로 중단됐다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138,165두가 수입되었고 1984년의 제4차 석유파동과 함께 소 값 파동이 발생한 이후에는 현재까지 육우를 번식용으로 수입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설명한 육우도입과정에서 생각을 했어야 할 과제는 일본화우의 개량과정이 이미 1944년과 1966년에 육용으로 개량됐다는 평가가 있어 이러한 자료가 입수 됐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우의 육용화가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어떻게 내려서 육우교잡에 의한 신품종육성과 도입육우의 번식사업에 전념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우리사회의 편향된 사회상을 볼 수가 있는 한 단면이며 다음에 정리하고자 하는 한우개량사업의 과정을 살펴보면 더 더욱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한우의 개량과정을 보면 농경우의 증식에서 개량방향을 설정해 1963년 축산법제정에 따른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으나 1969년에 한국종축개량협회가 설립돼 1970년에는 한우기초우(韓牛基礎牛) 379두가 등록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종축의 자질개량과 혈통보존을 위한 법적근거가 1976년에 뒤늦게 만들어져 1979년에 한우개량단지 78개소를 10개년 간에 만든다고 발표했으나 각도에 1개소씩 8개소를 지정한 후 중단됐다가 1987년부터 확대하기 시작했고 한우 종모우선발체제도 이때부터 실행하게 됐다. 특히 한우의 개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한우개량사업소의 설립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우개량사업소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께서 1969년에 28,800ha의 면적에 삼화목장이라는 한우목장을 설립했으나 부정축재사건으로 1982년에 한국지도자육성재단에서 인수해 관리하게 되었고, 1982년 12월에 1,130ha로 면적을 줄여서 축산진흥기금으로 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다시 인수해 한우종모우를 사육하는 한우개량기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순수한우 개량기지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많았으나 당시 송찬원 축산국장께서 두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어렵게 합의를 도출시켜 한우목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