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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성우 박사의 ‘相生畜産’ / 88. 푸른 초원에서 그날, 꿈은 시작되었다

‘한독시범목장’ 개장식 대통령 연설 듣고 축산 전공 자부심
농협 입사 반년만에 한독목장 발령…꿈의 첫 단추 채워

  • 등록 2019.05.01 10:47:38


(전 농협대학교 총장)


▶ 그날은 대한민국 낙농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날이었다. 1969년 10월 11일 10시,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신두리 산 46번지, ‘한독낙농시범목장(韓獨酪農示範牧場)’ 개장식 행사가 열린 날이다. 역사적인 개장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의 감격스런 목소리가 푸른 초원에 메아리쳤다.
 “이런 땅을 목장으로 개발해서 우리나라의 축산산업을 발전시킨다면, 첫째 우리 농민 여러분들의 소득이 증대되고, 둘째로 우리 국민들이 쇠고기나 우유를 많이 먹음으로써 보건과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여기서 생산되는 고기나 우유를 해외에 수출까지 할 수 있다면 외화 획득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도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 역사적인 한독낙농시범목장의 개장식을 보러온 수많은 사람들이 풀밭과 언덕을 가득 메웠다. 그 인파 속에서 농과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박 대통령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잘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국민들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 선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대규모의 낙농시범목장을 건설한 대통령의 깊은 뜻과 굳은 의지를 직접 육성으로 들으며 나는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에 휩싸였다. 내가 축산학 전공의 길을 택한 것은 얼마나 잘 한 일인가. 한 나라의 지도자의 의지가 저러하다면 우리나라 축산은 반드시 부흥할 수 있고 농촌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감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당시 멀리서나마 군중 속에서 들은 대통령의 연설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가치 있는 만남이었다. 그날 나는 축산을 통해서 잘 사는 농촌을 이루는데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의 명제와 방향을 제시해 준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 그날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안성 군민이 모두 모인 것처럼 인산인해였다. 당시는 흰 두루마기를 많이 입고 다니던 때라 풀밭도 언덕도 하얗게 덮였다. 대통령 얼굴도 직접 보고, 소문에 큰 목장이 생겼다는데 얼마나 큰가 보러 가자고 너도나도 일손을 놓고 모여든 것 같았다.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나서 현장을 둘러보며 걸음을 뗄 때마다 군중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나는 인파에 휩쓸려가며 우사와 농기계 등을 둘러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대형 트랙터, 밭가는 기계, 풀 베는 기계, 풀 뒤집는 기계, 풀 묶는 기계, 퇴비 뿌리는 기계, 젖 짜는 기계, 우유저장 탱크 등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 그렇게 많은 소를 한 목장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젖소는 캐나다에서 임신암소 200마리를 도입했다고 들었다. 우사 4개 동에 각 우사마다 한 줄에 26마리씩 두 줄, 모두 52마리가 매어져 있었는데, 일렬로 서 있는 장면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내가 축산학과를 선택한 것도 바로 이런 목장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개장식 행사 내내 들뜬 기분으로 목장을 둘러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목초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소나무 숲 언덕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초지를 바라 볼 때의 감동이란, 가슴이 확 트이면서 주체하기 어려운 짜릿한 느낌, 그건 다름 아닌 전율 그 자체였다.


▶ 나는 수원에서 농과대학을 다닐 때도 일요일마다 안성 집에 돌아오면 가끔 한독목장을 찾아갔다. 젖소들을 보고 광활한 초지를 둘러보는 게 너무 좋아서였다. 또 제대 후 농협의 첫 발령지가 평택군농협이었기 때문에 안성 공도에 살던 나는 이때도 자주 한독목장을 방문했다. 당시 이희영 장장께 인사도 드리고, 고 이철우 대리(수의사)와 이정훈 주임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래서 갈 때마다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후배인 내게 도움이 되는 말씀도 많이 해 주셨다.
  그러던 중 1976년 4월 중순, 이희영 장장께서 내게 전화를 주셨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으니(이정훈 주임이 가축병원 개업을 위해 퇴직) 목장에서 근무할 생각이 있으면 끌어주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가겠다고 했다. 내가 축산을 전공하고 꿈을 꾸어 온 것이 목장이 아니던가. 이틀 후 중앙회에서 인사발령이 났고, 나는 6개월간의 평택군농협 생활을 마치고 한독낙농시범목장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목장을 해보겠다는 나의 꿈, 그 첫 단추가 채워진 셈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카우보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맡은 일은 350여 두의 젖소 사양관리였다. 낙농목장은 새벽부터 일이 시작된다. 5시 30분에 기상, 6시에 우사에 출근해 착유준비, 6시 30분부터 착유를 시작하고 7시 30분경 착유가 끝나면 소를 방목장이나 운동장으로 내몰고 아침을 먹는다. 이런 게 목장의 아침 풍경이다. 사양과 주임을 맡은 나와 함께 일을 하던 목부들은 모두 16명(착유사 12명, 육성사 2명, 송아지 방 2명)이었다. 나는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으므로 우리 나이로 26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목부들은 나보다 대부분 10살이나 위였고, 사양기사장 4명은 40대 초중반으로 나이가 많았다. 연장자인 목부들을 지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과를 함께 하면서 젖 짜는 일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조직이든 그 분야에 정통하지 못하면 통솔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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