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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성우 박사의 ‘相生畜産’ / 72. 녹색혁명(Green Revolution) (2)

퇴비증산운동 전국적 추진…쌀 생산량 향상 기여
화학비료 남용, 지력 약화…축분뇨 자원화 촉진 이유

  • 등록 2019.02.20 10:57:04


(전 농협대학교 총장)


▶ 녹색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품종 ‘통일벼’의 개발뿐만 아니라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시책을 병행해서 추진했기 때문이다. 먼저 국가의 전 조직이 쌀의 자급 달성에 동원되었다. 시·도, 시·군·읍·면 등 지방행정조직이 신품종 ‘통일벼’의 보급에 앞장섰다. 시도지사, 시장·군수, 읍·면장이 직접 나서서 농민들을 설득하고 농사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농촌진흥청은 농업기술연구에 힘을 쏟았고 산하의 각도 농촌진흥원과 농촌지도소는 재배기술을 전파했다. 농업기술전도사 역할을 한 농촌지도사의 인원이 1962년 농진청 설립 당시 1천192명에 불과했으나 1963년에는 3천173명으로 배가되었으며 1965년에는 6천684명으로 1975년에는 7천925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쌀 자급과 농촌소득증대에 정부가 얼마나 중점을 두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농협은 비료, 농약, 농기계의 공급으로 뒷받침했다. 정부가 통일벼 수매가를 일반벼보다 더 높게 책정한 것도 통일벼 재배면적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 통일벼는 키가 작고 잎이 직립으로 무성하여 바람에 넘어지지 않고 병충해에도 강한 특성을 가진 수확량이 많은 품종이지만 미질은 떨어져 밥맛은 종전의 품종만 못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재배확대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쌀 소비량이 1980년에 국민 1인당 연간 135kg으로 정점을 기록한 이후 1990년 120kg, 2000년 100kg, 2010년 70kg, 2017년 61.8kg으로 계속 줄어들면서 이제는 반대로 생산량이 소비량을 초과하여 재고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소비가 줄어드는 가운데 미질 향상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개량방향도 수량에서 품질로 선회했다. 지금은 맛이 떨어지는 통일벼는 더 이상 재배하지 않게 되어 역사 속의 품종으로 사라졌다.               


▶ 한편 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지력 향상을 위해서 퇴비증산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동네마다 마을공동퇴비장을 만들어 풀베기운동을 추진하면서 퇴비생산을 독려했다. 농가들은 마당에 퇴비장을 만들어서 가축의 두엄을 밟혀내어 유기질 퇴비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학교에서도 학급별로 퇴비장을 만들고 퇴비의 높이를 재어가며 경쟁을 시켰다. 월요일이면 주말에 베어온 풀을 짊어지고 등교하여 학급 퇴비장에 쌓았던 일이 기억난다.


▶ 농작물의 생육을 빠르게 하는 데는 화학비료의 효과가 좋다. 그러나 당시에는  1959년에 세운 충주비료공장에서 생산하는 비료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다. 정부는 화학비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나주비료(’63), 한국비료(’64), 경기화학 용성인비공장(’66)을 건설했고 이어서 대우 용성인비공장(’67), 풍농비료(’67), 팜한농(’67), 조선비료울산공장(’68), 남해화학여수공장(’77) 등을 건설했다. 비료공장 건설에 따라 화학비료생산량은 1962년 7만8천톤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59만톤을 생산, 처음으로 자급률 105%를 기록했다. 1977년 여수에 동양 최대 규모의 남해화학공장이 건설되면서 1980년에는 생산량이 134만5천톤으로 늘어나 자급률 162%를 기록, 비료수출국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수확량이 향상되기는 했으나 비료남용으로 인한 토양의 산성화와 유기물의 부족 등으로 지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토양개량제를 투입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아직도 토양의 개선을 위해서는 더 많은 유기질 비료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축분뇨자원화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비료와 더불어 병충해와 잡초 방제를 위한 농약의 공급을 늘린 것도 쌀의 증산에 기여한바 크다.    


▶ 농업기반확충을 위해서 설립된 농업진흥공사와 농지개량조합은 기계화가 가능하도록 경지정리를 하는 한편 관개·수리시설을 확충하여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농지는 일정한 크기로 반듯하게 정비되어 농기계 작업이 가능하게 됐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서 댐과 저수지를 건설하고 수로를 정비해서 물의 누수를 막았다. 정부는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 발전용수 등 다목적용도의 수자원확보를 위하여 1965년 섬진강다목적댐을 시작으로 남강댐(’69), 소양강댐(’73), 안동댐(’76)을 준공했으며 80년대 이후에도 대청댐(’80), 충주댐(’85), 합천댐(’89), 주암댐(’91), 보령댐(’96), 밀양댐(’01) 등 15개의 다목적댐을 건설했다. 다목적댐은 농업용수 공급에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다. 봄 가뭄으로 모내기에 차질이 올 경우에는 양수기를 동원하고 관정을 뚫고 지하수를 뽑아 올려서 모를 심었다. 천수답이 줄어들고 수리안전답이 늘어났다. 수확량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주곡인 쌀의 자급 달성을 위해서 정부가 취한 정책은 생산증대 만이 아니었다. 수요측면에서 주곡인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 보리, 콩 등 잡곡을 섞어서 밥을 지어먹도록 혼식을 권장했다. 어릴 때 점심시간에 선생님이 도시락 검사를 해서 흰쌀밥을 싸오면 야단을 맞기도 했다. 또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해서 국수 등 분식을 먹도록 권장했다. 일반식당에서도 토요일에는 쌀밥 대신에 분식을 팔도록 했다.
양조장에서 막걸리는 밀가루로만 제조하도록 규제하여 쌀막걸리는 오랫동안 맛을 볼 수가 없었다. 녹색혁명을 통해 생산량은 늘리고, 국민을 설득해서 소비량은 줄이는 양방향정책의 효과는 위력을 발휘했고 1974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쌀 자급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고 1977년에는 ‘녹색혁명의 성취’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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