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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토종이 강하다 / 토종이 강한 이유> 토종가축, 우리 자연적 풍토적 환경에 적응 잠재력 뛰어나

고려 건국초기 목장 건설…축산기술서 발간도
일제강점기·6·25전쟁 거치며 토종가축 거의 멸실
FTA 이후 축산물 안전성 부각…복원사업 본격화

  • 등록 2018.01.04 16:52:24
[축산신문 기자]


김 동 균 이사장(강원도농산어촌미래연구소)


최근의 문명발달로 인한 세상의 변화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져 나이 든 사람들이 현대사회에 적응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 세대 간 인식의 격차도 날로 커지고 있으며, 직업군의 변화나 사회상의 기존관념은 하루가 다르게 옛날의 추억처럼 변하고 있다. 매일 새로운 낱말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한 세대 전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면 언어장벽으로 인해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래전부터 이 땅 위에서 자생하던 ‘토종’을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도처에 생존해 있는 생물들은 그 지역의 자연과 기후풍토의 산물이므로 토종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축산신문’에서 ‘토종이 강하다’를 주문한 것은 토종가축을 의미한 것이 분명하므로 범위를 가축으로 국한해 논하고자 한다.


토종은 어떤 존재인가?
국어사전에는 토종을 ‘본디 그 땅에서 나는 종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종가축이라면 한반도의 토양에서 자란 사료와 물을 먹고 이 땅의 기후변화에 적응한 결과로 살아남은 가축종자들을 말한다. 그 중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는 한우(일반한우, 제주흑우, 칡한우), 토종돼지, 토종닭(모색 5종), 토종오리, 토종말, 토종벌이 이에 해당한다. 일제의 무분별한 가축개량 사업으로 거의 멸실되어가던 토종가축이 회생하게 된 까닭은, FTA이후 국내 축산물 수요충족을 위해 축산물 수입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정의 안전성과 옛 맛의 우월함을 잊지 못하는 소비자층이 형성되면서 한우를 필두로 해 한돈, 토종닭 등에 대한 수요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3년 2월에 토종가축을 축산법에 추가로 명시하기에 이르렀고, 하위법령의 제정을 위해 축산과학원은 토종의 외모적 특징과 유전적 특성을 정리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4년도에 토종가축을 공인할 기준, 절차 및 인정기관을 지정한 바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이 땅에서 서식해 오던 몇 종류의 가축 사육기반이 재생되었으나 혈청학적으로 100% 완전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토종복원과 얽힌 추억
엄밀히 보자면, 진정한 토종의 보존노력은 일제가 강점하기 전 가축들이 보존되어 맥을 이어야 하겠으나 일제강점기간 중 다양한 외래종의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토종의 기반유지는 크게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 땅 위의 대부분의 가축기반을 심각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광복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교통이 불편했던 관계로 일부 산간오지에 혈맥이 남은 곳이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복원사업이 진행된 점은 천우신조라 하겠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약 2세대 전인 1950년대 중반 무렵 살았던 강원도 산간지방 농촌에는 토종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당시의 가축이란, 농경을 위한 소를 제외하면 철저히 농가 부업적 형태로서 쌀뜨물과 잔반으로 키우던 몸집 작은 검은 돼지나 앞마당에 보리쌀을 던져주고, 곤충을 탐색하며 자생하던 마당닭 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겨울철 바깥채 외양간에서 기르던 누렁한우의 쇠죽을 끓이던 냄새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시기에 우리 조상들은 이른 새벽 작두질로 볏짚, 옥수수대, 콩깍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무쇠솥에 넣고 우물물을 부어 쇠죽을 끓여 먹였는데 밭갈이 직전에 며칠 동안 콩 한바가지를 얹어서 끓여주면 누렁이는 쇠죽을 맛있게 먹고 털빛에서 윤기가 넘치며 눈망울에 총기가 돋곤 했다. 쇠죽 쑤던 냄새-그것은 반세기의 시공을 초월해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나는 그리운 냄새이다.


토종은 정말 강한가?
지구 역사를 보면, 불과 1백만년 전만 해도 요즘은 볼 수 없는 여러 형태의 대형 맹수들이 있었으나 당시에 생태계를 주름잡던 대형 고양이과 동물들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멸종되었다. 소의 원시조상은 2천500만년전에는 발가락이 다섯개인 여우만한 짐승이었다. 이러던 것이 약 1천만년전부터 몸집이 불어나 대형 반추동물로 성장해 약 100만년전에 축우의 직계조상인 원우(原牛, Urus)가 출현했다.
그러나 원우도 1627년 폴란드에서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음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역사의 순환 속에서 많은 동식물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데 어떤 생명체는 우리가 발견도 하기 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지구 생태계의 사정이다. 또한 산불이나 전쟁으로 파손되었던 산하도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회복되어 조화로운 자연생태계를 형성하는 복원력을 지니고 있다.
인류의 위대한 지적 자산인 다윈의 진화론조차도 부침이 심한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1980년대 이후 진화발생학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지가 발달하고, 정보가 축적되어도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이해는 15% 정도에 불과하며 자연 생태계의 조화는 우리의 단순한 추측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위대하고도 정교하게 진행되고 있다. 소위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면 자신이 속한 족보나 대동보쯤은 구경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 오늘날 자신이 태어나기 전까지 수많은 조상들이 살다가 간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살아 남아있는 가축들도 사정은 같다. 즉, 토종의 맥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덕분에 오늘날 각종 토종협회와 인증기관들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위대하며, 이 강토에서 오랜 세월 적응하면서 살아남은 토종 가축들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강인한 존재들이다.


토종은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우리나라의 토종가축들은 선조들이 한반도에 정착해 살 무렵부터 인연을 같이했다고 봄직하다. 과거의 학설은, 우리 조상들이 우랄산맥기슭에서 이동해 몽고와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정착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고대유적이 발굴기술과 유전자 분석기술이 발달되면서 한반도에 이미 슬기슬기사람(현대인의 직계조상)이 6만년 이전부터 살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구 학설들이 약 1만년전 신석기 말에 개>소>말>양의 순으로 가축화가 진행되었으며, 7, 8천년 전에 돼지와 닭이 가축대열에 포함되었다고 했으나 유적발굴과 유전자 분석기술이 발전되면서 가축화의 연대는 점점 더 오래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가축들의 한반도 유입시기 또한 변동이 생길 만하다.
그리고 4천350년 전 단군께서 이 땅위에 나라를 세운 일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고 볼 만하다. 다만 개국설화들이 존재하는 것은 후인들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포장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주변에는 항상 가축이 존재함으로써 땅을 기름지게 하고 장례행사를 풍요롭게 하며(순장풍습), 무기와 약품의 재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나라 각 처에서 자생하던 토종가축들은 우리 조상들이 정착해 살아 온 세월과 궤를 같이하되 그 이용방법은 경험이 축적되면서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변형되었다고 보아서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과거 역사적 증거에 의존해 한우, 닭, 돼지가 한반도에서 축화된 시기를 2,3천년 정도로 본 것은 너무 소극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史料)에 남겨진 토종가축의 사육배경
한반도에 가축이 이용된 근거로 가장 오랜 자료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진 고대사에서 낙랑군 동남쪽(지금의 강원도)에 ‘위’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고 이 무렵 만주지역에 위치한 부여에 마가(馬加), 우가(牛加) 등 6가지 가축의 관직명칭이 사용되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을 가축사육의 고증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명(加)은 Gahan, Kan이라는 족장의 명칭을 한자어로 나타낸 것으로 이 명칭은 후에 장관의 직명으로 변했다.
위지한전(魏志韓傳)에 의하면, 마한에서는 소를 타고 다닐 줄 모르고 순장용으로만 이용한 반면 변한에서는 소, 말을 타고 다닌 기록이 있고 제주도에서는 소와 돼지를 길렀다고 했다. 또한, 김해패총(A.D. 1세기경)에서는 경종농업의 유품이 발견되었다. 최근 발굴된 가야 농경유적에서도 가축을 이용한 농법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본격적으로 기록에 남겨진 것은 3국시대 초엽 이후의 일로서 신라 눌지왕때 백성들에게 우차를 타는 법을 가르쳤으며, 지증왕 때에는 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우경법이 보급된 것이 그 확실한 증거로 남아 있다.
이후 고려 건국초기에 10여개의 목장이 건설되었으며, 고려 현종, 의종때에는 수의학의 발달과 함께 축산기술서로 ‘축마요식’이 발간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가축 사육기술은 자연방목과 사람의 조력을 곁들인 형태로서 ‘청초절’(풀이 푸르게 성장한 시기)과 ‘황초절’(풀이 누렇게 마르거나 구할 수 없는 시기)로 나누어 가축의 종류나 연령에 따라 먹여야 할 사료의 종류와 분량을 안내하고 있으니 이것은 오늘날 ‘가축사양표준’과 같은 개념이다. 특히, 겨울철에 소나 말에게 ‘황초’ 몇 단을 먹이도록 안내한 점은 이 시기에 이미 건초나 볏짚을 사료로 이용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또한 우왕때에는 우락(牛酪)진상을 금하라는 명을 내린 것으로 보아 임금이 발효유를 먹어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은 면면히 이어져 이조 태종-세종시대에 전국에 159개의 목장이 건설되었고, 정종 원년(1339)에 마의방과 우의방(牛醫方)을 간행함으로써 수의학이 크게 발달되었다. 이 기술로써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중국 황후의 중병을 완치시킨 쾌거가 오늘날 드라마에 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가축의 사육법과 수의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나라 토종들이 보존되어 왔다.
역사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진행되고 있다. 그 내역이 인문적이거나 자연생태적이거나 예외는 없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2억5천만년전에 겪은 생명계 대멸종의 사건보다 빠른 속도로 생태계가 변동되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가축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그 대비책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하다. 토종가축들은 지연적으로나 풍토적응 면에서 왜래종보다 적응잠재력이 강하다고 볼 때 이 장점을 살려 축산물을 확보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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