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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에서>도처에 널린 한우사업의 적

  • 등록 2017.05.02 18:12:15

 

이 상 호 본지 발행인

살다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일 때가 더러 있다. 몹시 부끄럽거나 당황스러울 때가 그런 경우인데 한 20일여 전쯤 필자도 딱 그런 경험을 했다.
봄꽃을 보면 가물가물한 유년의 추억을 더듬고 싶어진다는 자칭 문청(文靑) 출신 친구의 꼬드김에 필자와 친구 몇이 소풍을 모의했다. 목적지는 ‘문청친구’의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정하고 4월 셋째 주 토요일 새벽 우리 일행 10명은 청량리에서 안동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김밥과 삶은 계란을 꺼내며 수다를 떠는 친구들의 모습은 자신들이 점잖 빼기에 익숙한 ‘꼰대’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삶은 계란 탓에 마신 사이다의 탄산 때문에 여기저기서 트림을 해댔지만 그 모습이 귀엽기조차(?) 했다.
이렇게 출발한 봄소풍은 온갖 꽃들이 만개한 낙동강을 바라보며 숨은 듯이 자리한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 서애 유성룡선생이 말년에 징비록을 집필한 하회마을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마냥 들떠 있던 중년사내들의 행복한 봄나들이는 딱 여기까지였다.
사달이 난건 저녁식사였다. 안동이 한우의 본 고장이고 당신이 한우고기에 관한한 전문가 아니냐며 저녁은 한우고기로 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이 내심 반갑기도 해서 안동에선 꽤 유명한 전문식당을 찾았다. 식당입구에 붙은 커다란 메뉴판에서 갈비살과 등심이 1++이란 표시를 보았기에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갈비살 10인분을 주문했다. 하지만 종업원이 불판에 올린 고기는 질겨서 씹기조차 어려웠다. 혹시나 싶어 종업원에게 팁까지 쥐어 주며 등심을 추가 주문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난감해 하던 필자의 표정을 읽은 한 친구가 서둘러 공기 밥을 시키면서 우리의 한우고기 파티는 막을 내렸다.
문제는 귀경열차에서였다. 취기가 오른 일행들 사이에서 방금 전 한우고기에 대한 품평이 이어졌는데 결론은 사기극으로 모아졌다. 이래서야 어떻게 한우고기를 먹겠느냐며 성토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것 같았다. 이날 청량리역에 내린 우리 일행은 ‘사기극’을 막지 못한 죄인(필자)의 제안으로 근처 실내포차에서 삼겹살두루치기와 조개탕 국물을 안주로 꽤나 많은 소주병을 비웠다.
이 일이 있은 후 평소 가까이 지내는 한 지인에게 이날 있었던 얘기를 꺼냈더니 “안동에 지인이 한 둘이 아닐 텐 데 미리 전화라도 해놓지 그랬느냐”며 필자의 융통성부재를 탓하는게 아닌가. 말하자면 ‘빽’을 동원했어야 했다는 얘긴데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메뉴판 표시대로 값을 치르는데도 별도의 청탁이 필요하다면 이게 정상인가.
사실 일반인들은 생활 주변에서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는다고 봐야 한다. 식당에 가서 주문한 고기의 등급을 물어 보면 십중팔구 1++ 아니면 1+이다. 사실상 고객은 이를 검증할 수단이 없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이를 확인하겠다며 덤비다간 모처럼의 가족외식이나 접대 분위기를 망칠 각오를 해야 한다. 악덕업주들은 바로 고객들의 이런 약점을 노린다.
문제는 일부 악덕업주들의 얄팍한 상혼에 죄없는 생산자들이 희생양이 되고 민족산업인 한우산업이 멍든다는 점이다. 정부와 한우협회, 그리고 한우자조금 차원의 노력으로 인해 둔갑판매는 많이 근절된 게 사실이지만 식당에서의 등급속이기는 여전히 속수무책인 듯하다.
해외여행이 일상화되고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소비자들은 갈수록 냉정해지고 있다. 한우산업의 애국마케팅이 한계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경제는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중심의 경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식당에서의 등급속이기를 근절하는데 생산자조직이나 자조금이 원산지표시 단속 때처럼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다. 정부당국의 적극적인 단속을 견인하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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