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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가 걸은 60 성상(星霜)의 목장길><82> 아동 급식용 우유 공급계획과 미 농무관의 오해

  • 등록 2016.08.19 10:35:32
[축산신문 기자]

 

김 강 식 고문((사)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

 

美 우유·빵 급식 원조…빵 대신 쌀 원료 떡 제공 제안
어릴적부터 밀에 길들여져 빵 주식될까 우려 차원

 

1976~1979년 축산국장 재임 시 주 한국 미대사관 R.Block 농무관으로부터 미국 축산 농업 시찰을 수차례 요청받은 바 있으나 수락을 하지 못했다.
R.Block 농무관이 미국 축산시찰을 요청한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아동 급식위원회에 축산국장이 위원으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교부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급식메뉴 중 우유가 중요한 품목이다. 이 우유를 농림수산부가 무상으로 공급했다. 공급량을 늘리려면 농림부의 협조 없이는 안 되기 때문에 축산국장이 아동급식위원회 위원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축산시찰을 요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문교부 아동급식위원회 회의 시 축산국장이 참석하지 않고 당시 낙농과장이 대리참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1978년 어느 날 문교부 아동급식과 박준교 여성사무관(농촌진흥청 생활개선과 생활지도관 근무)이 찾아와 이번 회의에는 과장을 대리 참석 시키지 말고 국장님이 직접 참여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어 농촌진흥청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의 체면 유지를 위하여 바쁜 시간을 쪼개어 동 회의에 참석했다.
지금 생각으로 우유 무상급식량이 얼마인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물량과 금액이 농림부가 부담하기에는 힘든 규모였다.
나는 농림부 윗분과 상의해서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발언을 하고 단 한 가지 농림부 입장에서 부탁하겠다며 한 마디 한 기억이 난다.
그 내용인 즉, 초등학교 아동에 우유와 같이 주식으로 공급하는 것이 밀가루로 만든 빵인데 이 빵 대신 쌀로 만든 빵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장떡(발효떡)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시책을 검토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본인이 1977~1979년 일본 농림성 축산시험장 기술연수 시 동 시험장이 위치한 지바(千葉)시내에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친척이 있어 그 집에 가끔 머물 기회가 있었다.
부부는 아침 일찍 본인들이 경영하는 공장에 출근하기 전 아이들에게 아침 식사로 토스트, 빵과 계란후라이, 우유를 나눠주었다. 아침식사 후 등교하여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하는 빵과 우유(분유로 만들어진)로 먹게 됐고, 오후 5시경 하교하여 집에 오면 아이들은 부모의 늦은 귀가 때문에 라면과 햄, 소시지, 양배추를 넣어 끓인 라면으로 또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쌀로 만든 밥을 먹는 날은 부모님과 함께 있는 일요일만 가능했고 그 이외에는 빵과 우유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전후 일본의 식량난으로 어려웠을 때 미국이 밀과 분유를 아동급식용으로 무상원조하여 전후에 자란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빵과 우유의 식생활에 적응되어 매년 막대한 재고미가 누적되어 있음을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아동급식용으로 우유는 농림부가 공급하겠으니 밀가루로 만든 빵 대신 쌀로 만든 주먹밥 또는 기장떡(요즘은 김밥)으로 공급하여 미국의 식량(밀과 분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발언했다.
동 위원회에 참석한 대학 식품영양학 교수 및 아동 신체발달 관계 전문가가 나의 발언에 동의하면서 쌀 식생활이 지속될 수 있는 방향의 아동 급식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동 회의 일주일 후 주한 미대사관 R.Block 농무관이 축산국장인 본인을 만나 문교부 아동급식위원회에서 발언한 그 내용을 어디서 들었는지 묻기에 본인이 일본 2년 기술연수 시에 일본에 거주하던 친척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본인 스스로가 느낀 것이지 일본의 어느 자료에서 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에 대한 부탁이 미국의 식량 원조정책이 기아에서 헤매는 2차 대전 후 식량난에 어려운 나라에 지원한 것이지 먼 장래로 본 미국 농산물 시장개척의 사업이란 오해가 가지 않도록 이야기하여 달라고 하는 정도의 건의와 의견교환을 끝내고 헤어졌다.
축산국장 재임 39개월 동안 수요에 비해 부족한 쇠고기, 돼지고기 수입 없이는 물가안정을 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77년부터 쇠고기, 1978년에는 돼지고기 수입이 불가피하여 국내 축산물 증산대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경제성장에 역작용이 될 수 있는 소비자 물가안정에 필요한 최소한도내에서 수입, 공급함으로써 물가안정에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수입액과 판매차액을 축산진흥기금으로 조성, 축산생산기반 및 유통개선 사업에 투자했다.
이런 상황에 미국으로부터 축산업계 시찰을 초청받았으나 나는 그 당시 미국 시찰 없이도 미국의 협조와 지원 사항이 무엇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국내 당면 문제가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장기간 자리를 비울수도 없어 계속 기간을 미뤄왔다.
농담으로 내가 만일 미국의 광활한 평야의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 콩, 밀 재배농장과 육우, 젖소 목장을 보면 우리 축산발전의욕이 상실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대규모 축산업이 발전된 미국, 호주, 캐나다의 축산현황보다 먼저 유럽의 축산현장을 먼저 보고 싶다고 하면서 정중히 초청을 사양한 바 있다.
1979년 8월 축산시험장 장장 부임 후 1979년 9월 축산국장 재임 시 계획되었던 영국, 덴마크, 스위스, 스웨덴의 축산현황을 먼저 시찰한 바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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