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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가 걸은 60 성상(星霜)의 목장길><72> 한우 조기육성 비육 기술개발의 험난한 길

  • 등록 2016.07.13 10:39:16
[축산신문 기자]

 

김 강 식 고문((사)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

 

인공유 개발, 국가 불승계 심사로 특허권 본인에게 이양돼
농협에 양도해 흑자경영 기여…특허료 성금 기탁

 

1972년 5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임석 하에 경제동향보고에서 본인이 시험·연구하여 개발한 인공유에 대해 보고드렸다. 3개월령에 인공유로 이유한 한우 송아지 조기육성 비육 연구에 대한 최종 보고 상황에서 본인은 “금후 보급 계획에 인공유 생산 특허권은 정부 보유로 하고 특허 실시권은 농협중앙회에 이양하겠다”고 보고했다.
그 이후 인공유 제조 특허를 신청하여 1973년 4월 20일자로 농촌진흥청 발족 이후 처음으로 특허가 인정되어 우선 후속조치로 공무원 직무발령 보상법에 의거 국가승계를 위한 심사신청을 한 결과 동 심사위원회에서 불승계로 의결됐다.
정부 불승계시는 특허권을 발명자에게 돌려주는 규정에 따라 1975년 2월 14일자로 농촌진흥청장으로부터 특허권을 본인이 양도받아 1975년 4월 12일자로 인공유 생산 실시권을 농협중앙회의 부산 사료공장에 양도하고 그 결과를 1975년 5월 13일자로 농촌진흥청장과 농림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에 농협중앙회로 하여금 한우, 젖소, 송아지 조기 이유 육성을 위한 인공유(농촌진흥청 개발, 발명특허 제3939호) 팜플렛을 제작하여 전국 시·군 농협과 농촌지도소를 통하여 10월부터 생산·공급 지도하게 됐다. 그 결과 당해 연도 1975년 319톤, 1976년 1천625톤, 1977년 2천57톤, 1978년 4천833톤으로 그 중 우편 주문도 316톤이 있어 전국 젖소, 송아지를 기르는 농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송아지 이유사료로 인정받았다.
인공유 특허권이 공무원 직무 발령 심의위원회에서 부결되어 발명자인 본인에게 인계됨으로써 1976~1977년까지 발생한 특허료 720만원은 농촌진흥청 녹색혁명기금으로 기증하고 그 후 1980년까지 발생한 2천660만원은 청와대 새마을 성금으로 기탁했다. 그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은 3천만원을 농림부 월례조회 때 당시 고건 농림부장관이 전수함과 동시에 이 사실이 TV 및 일간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하사금으로 받은 3천만원은 당시 축산시험장 재직 연구사 연구관으로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의 등록금 및 논문 인쇄비용으로 지원했다.
이상과 같이 인공유 개발 국가 소유 특허출원, 공무원 직무발명 보상법에 의한 국가 승계여부 심사에서 부결, 정부 소유 특허권이 동법 규정에 따라 본인에게 자동으로 이양됐으나, 이 특허권을 민간 사료공장에 줄 때 특혜사항이 되기 때문에 공적기관인 농협중앙회 배합사료 공장에 양도하여 한 치의 부끄러운 행동을 한 바 없는데 본인이 정부예산 연구비로 연구한 결과를 개인의 특허로 출원하여 특허 이득을 챙기고 있다는 1981년 축산시험장장 때 신군부 국보위의 공무원 숙청 명단에 본인이 포함되어 농촌진흥청장에게 해직 통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농촌진흥청장인 윤근환 청장(농협중앙회장, 농림수산부장관 역임)은 1972년 인공유 개발 연구 당시 청와대 농림 담당비서관으로 축산시험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본 시험연구결과를 종합 정리해 박정희 대통령께 직접 보고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공유 개발, 특허획득, 특허권 농협이양, 특허료 새마을 성금 기탁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본인에게 해임통보가 있었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당시 정종택 농림수산부장관님께 보고, 농림부는 국보위에 설명해 무마됐다는 사실을 얼마 후에 알게 됐다.
1965년 국민 1인당 소득 114$에서 1975년 531$, 1985년 3천800$로 높아질 때, 1975년 육류 전체소비량은 9만7천600톤(쇠고기 2만7천261톤), 1985년 22만4천734톤(쇠고기 7만292톤)으로 증가할 때를 대비 당시 한우 전국 도살 평균체중 359kg 내외를 외국 육우와 같이 450~500kg로 늘릴 수 있는 기술개발이 최우선 연구개발 과제라고 판단했다.
이에 1967~1969년 외국 기술연구 중 한우 송아지의 조기발육 부진의 원인과 대책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결과 2년만에 귀국하여 1970~1972년까지 인공유로 조기 이유 18개월령에서 450kg 비육우를 생산하고 1974년 농가 실증시험으로 생후 18개월령 517kg, 20개월령 564kg, 24개월령에서 655kg의 비육소를 생산 할 수 있는 기술을 확립했다.
이를 기반으로 오늘까지 36개월령에서 체중 800kg 육질 +, ++의 비육우 생산기술의 기초가 되었는데 당시 격려는 못할망정 모함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하다. 식량자급의 녹색혁명을 이룬 통일벼 역시 갖은 모함을 겪었으나 청와대의 믿음이 있었기에 1977년 쌀 4천만석 생산 주곡 자급을 달성한 사례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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