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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가 걸은 60 성상(星霜)의 목장길> <57> 축산물 중장기 수급계획 대 실적의 오류

경제개발사업 힘입어 국민소득 향상…축산물 수요 폭증
공급 확대 축산진흥정책 박차…수급안정 역부족

  • 등록 2016.05.09 10:55:41
[축산신문 기자]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남한의 가축 사육두수는 한우 59만7천85두, 젖소 1천661두, 돼지 19만5천271두, 닭 1백51만6천589수 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착수하던 1962년의 가축 사육두수는 한우 1백9만5천두, 젖소 1천500두, 돼지 1백26만2천두, 닭 1천1백3만천수로 국민 1인당 연간 축산물 소비량은 육류 3.6kg, 우유 0.05kg, 계란 31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착수한 해로부터 10년이 경과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종료되던 1971년도 가축사육두수는 한우 1백33만8천두(122%), 젖소 3만6천두(240%), 돼지 1백24만7천두(639%), 닭 2천4백53만7천수(224%)로 증가하였으나 호당 사육두수는 한우 1.2두, 젖소 9.5두, 돼지 1.4두, 닭 23.4수에 불과하였다.
당시의 가축 사육형태는 농가 생산 곡물 부산물인 쌀겨, 보리겨, 참깨박 및 잔반을 이용한 축산으로 제 1,2차 경제개발 계획 성공에 의한 국민 1인당 GNP는 1962년 82불에서 1971년 300불로 365% 증가하였다.
경제개발 4,5차 목표연도인 1976년에는 797불(971%), 1981년에는 1천179불(2천96%)로 급성장할 때까지의 농산 부산물을 가지고 수요가 폭증하는 동물성 고급식품인 육류, 우유, 계란 등의 공급은 불가하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농림부는 1972~1981년까지의 축산진흥계획(1973.12.8)을 수립, 박정희 대통령께 직접 보고하고 동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계획의 목표는 1981년 육류 수요는 264% 증가한 49만3천톤, 우유는 605% 증가한 49만톤, 계란은 241% 증가한 40만4천톤(67억3천2백만개) 생산 공급계획을 수립하여 추진, 한우 증식은 1972년 1백33만3천두에서 150% 증가한 1백99만7천두를 목표로 하고, 실적은 1백31만1천두(66%)였다.
젖소 증식은 1972년 3만6천128두에서 20만465두를 목표로 하였으나 19만4천206두(96.8%), 돼지 증식은 1972년 1백24만7천두에서 58% 증가한 1백97만1천두를 목표로 하였으나 1백83만1천두(93%), 닭 증식은 1972년 2천4백53만7천두에서 1976년 75% 증가한 4천7백96만7천수를 목표로 하였으나 2천3백7만천수(94%) 실적을 보였다.
이에 따라 축산물 생산 공급 부족으로 1972년 대비 1976년 전체 물가지수는 422%, 식료품 486%, 축산물(육류) 653% 증가하였기 때문에 축산물 가격안정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였다.
1972~1976년까지의 축산물 생산 공급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한 결과, 1972년 GNP 700불에서 1981년에는 1천500불, 1986년에는 3천857불, 인구 1976년 3천5백86만명에서 1981년 3천6백80만7천명, 1986년 4천2백8만8천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 전망에 따른 우육은 7만5천533톤에서 1981년 11만6천211톤, 1986년 17만9천544톤, 돈육은 11만3천620톤에서 1981년 19만76톤, 1986년 30만6천119톤, 계육은 1976년 6만886톤에서 1981년 13만2천526톤, 1986년 26만6천557톤의 수급계획을 세웠다.
가축별 증식 계획으로 한육우 1976년 1백46만5천두에서 1981년 1백79만2천두, 1986년 2백43만9천두, 돼지 1976년 1백55만4천두에서 1981년 2백40만8천두, 1986년 2백97만6천두, 닭 1976년 2천6백28만3천수에서 1981년 4천5백74만4천수, 1986년 7천3백56만8천수로 확대하기 위한 사육기반 및 증식계획 추진을 위한 축산물 축산시책도 수립했다.
첫째, 쇠고기 증산을 위한 비육 사업은 1976년도 기히 입식한 비육우 4만1천900두를 1981년까지 34만6천200두를 입식하여 비육우 출하비율을 30%에서 80%로 증가시켜 국내산 쇠고기 7만8천533톤을 1981년 11만6천211톤, 1986년 17만9천330톤을 생산·공급하는 큰 소 비육사업을 실시할 계획을 수립, 추진하기로 계획했다.
1976년 당시 전국 한우 출하체중은 평균 359kg(지육 174kg, 정육 130kg)에 불과했으나 본인이 1974년 축산시험장 영양생리과장 재직 시 큰 소 비육 시험결과 250kg 비육 밑소를 입식 비육기간 90, 150, 180일 비육 시는 출하체중이 352, 397, 449kg, 정육생산량은 148, 172, 196kg 되고, 300kg 비육 밑소 입식하여 50, 150, 210일 비육 시는 출하체중이 386.6, 455.0, 509kg로 정육생산량은 165, 201, 230kg로 당시 소 전국 도축 평균체중 359kg(정육 130kg) 보다 정육율 26~77%(정육량 33.8~100.1kg)를 증산할 수 있는 큰 소 비육 사업을 최우선으로 적극 추진했다.
1977년 기준, 비육우 출하비율 40%, 1981년에는 전체 출하두수 59만8천334두 중 비육우로 48만960두(80%)를 출하시켜 우육 자급률 95.7%로 하고 부족량 5천톤을 수입목표로 하였다.
1976년 한우 사육두수 1백56만6천두에서 1981년 1백80만5천두를 목표로 하였으나, 1981년에 28%가 감소한 1백31만2천두로 우육 공급량도 10만1천441톤 계획에 공급은 7만7천602톤으로 2천839톤이 부족하게 되어 2만4천716톤(13만772두분)의 우육을 수입 공급하게 되었다.
돈육은 24만9천톤 공급을 위하여 사육두수 2백36만3천두 목표로 했지만 실적은 돈육 20만9천톤(84%), 사육두수 1백83만1천두(77%), 계육은 9천8백10만4천톤을 목표로 했지만 공급은 9만646톤(92%)으로 계획의 공급량 사육두수에 큰 차이가 났다.
이 뿐만 아니라 2001년의 사육두수 계획 대 실적 한우 61%, 젖소 85%, 돼지 96%, 닭 103%로 가축별로 큰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생산자 및 소비자 가격안정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는 점을 감안, 수요 및 생산 공급계획 수립의 시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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